오피니언 사설

수도 이전 계획 더이상 집착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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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가 어제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해 재판관 8대 1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수도 이전을 두고 계속돼온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야당이 극력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헌재가 밝힌 대로 개헌 절차(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과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를 거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먼저 온 나라를 들쑤셔놓은 수도 이전 논란이 여기서 끝나게 됐다는 점에서 다행이다. 수도 이전 같은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대 사안이 정략적 발상에 의해 추진되고, 여기에 표를 의식한 야당까지 가세해 나라를 흔들어 놓았다는 현실이 우리 정치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정치적 결정들이 헌재에 의해 제동이 걸려 법치가 한 수준 올라간 것은 분명히 환영할 대목이다.

대통령을 포함해 현 정부는 헌재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법이론이 어떻고 하며 헌재 결정을 폄하하거나, 편법이나 꼼수를 통해 뒤엎으려 해서는 안 된다. 헌재의 결정은 누구도 뒤집을 수 없는 최종 판단이기 때문이다. 또 수도 이전에 목매어 개헌을 통해 수도 이전을 밀어붙이려 해서도 안 된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가까스로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1 야당인 한나라당이 극력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의 하나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하더라도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절차를 밟는 데 걸리는 시간만 해도 4개월 가까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또다시 찬반 공방과 이념적.지역적 대결로 엄청난 갈등과 혼란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 게 뻔하다. 이는 비틀거리는 경제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강행한다면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다. 헌재 결정에 따르면 당연히 수도 이전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접는 것이다.

이번 헌재 결정은 무엇보다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한 중대한 사안을 국민 다수의 의사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선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헌재가 결정문에서 "서울이 수도라는 점은 우리의 제정 헌법이 있기 전부터 전통적으로 존재해 온 헌법적 관습이며 헌법 조항에서 명문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헌법에 전제된 규범으로서 관습헌법으로 성립된 불문헌법"이라며 "관습헌법 사항을 헌법 개정 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법률의 방식으로 변경한 것은 국민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권을 침해했다"고 못박은 것이다. 재판부가 신행정수도 건설이 곧 수도 이전이라고 규정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정부.여당은 반대 의견에는 귀를 막고 특별법이 통과됐다는 이유로 수도 이전 작업을 추진해 왔다.

우리는 이번 결정을 계기로 지금 이 정권과 여당이 추진하려 하는 국가보안법.신문관계법.사학법 등에 대해서도 겸허하게 성찰하기 바란다. 국민 여론과 헌법을 무시해 가며 밀어붙이는 법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헌재 결정은 또 법치주의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준 동시에 법적 논리를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국민교육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자치단체.시민단체.학자 등도 이해관계에 따라 찬반으로 나뉘어 극한 대립을 보여왔으나 헌재가 분명한 법 해석을 통해 판정을 내려줬기 때문이다.

우리는 헌재의 결정을 확대해석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을 경계한다. 이번 결정은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게 아니며, 수도 이전을 추진하는 절차가 위헌임을 지적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정략적으로 역이용하기 위해 정권의 진퇴와 연결하려는 어떤 시도도 있어서는 안 된다. 먼저 노무현 대통령은 비록 "수도 이전에 정권의 진퇴와 명운을 걸겠다"고는 했지만, 이 말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한 게 부적절했지만 수도 이전은 수도 이전 문제일 뿐이다. 야당이나 보수세력, 또는 노 대통령에 반대하는 세력이 역시 이를 기화로 정권 정통성과 연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혼란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지금은 수도를 이전하려 했던 목적인 국토 균형발전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국민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