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이 좋다] 이순철 춘천 MBC PD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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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호수에 하얀 눈이 덮이고 강이 얼어 놀잇배들이 가슴을 웅크린 채 반듯이 누워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몇십년만의 추위와 몇년만의 큰 눈은 연일 기록을 갈아치웠다.

어린 시절 춘천의 겨울은 늘 이랬다. 별반 호들갑스러울 것도, 추위에 부들부들 떨 일도 없었다. 추우면 추운대로 공지천에 나가 얼음을 지치고, 날이 풀리면 할머니 손에 이끌려 나물 캐러 다니며 호수의 진한 물비린내를 맡으면 그만이었다. 언제나 호수를 바라보며 하늘을 지붕 삼아 안개를 노래하면 좋았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자연 속에 머물게 놔두질 않았다. 데카르트, 칸트 그리고 쇼펜하우어를 알 무렵 사람은 으레 서울로 가야 성공한다는 말을 들었다.

예비고사가 끝나기 무섭게 우리들은 서울로 내몰렸다. 서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니 서울에서 출세하기 위하여 비싼 학비와 하숙비를 물어야 했다.

매학기마다 사라지는 송아지 한 마리. 그래도 부모님들은 서울 간 자식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성공할 거라고 송아지는 별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IMF는 아니었지만 경제가 어려워졌고, 서울에서도 소위 일류대 출신이 아니면 취직이 힘든 그런 때였다.

좌절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금의환향을 바라던 부모에게 한없이 죄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바로 고향의 호수였다. 서울에서처럼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적대심도 없었고, 너를 이겨야 내가 살아난다는 승부욕도 없었다.

무미건조한 듯해도 우러나는 정이 있었고, 무색무취한 듯해도 은근한 사랑이 있는 곳이 바로 호반의 도시 춘천이었다.

춘천은 상처를 안아줄 수 있어서 좋다. 어떤 아픔을 안고 왔더라도 누구하나 탓하지 않는 것이 이곳 이다.

이삼년만 살아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춘천 사람이 되고 만다.

상처는 그저 흐르는 물에 띄워버리거나 안개 속에 묻어버리면 그만이다. 다만 욕심이 많거나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올 필요가 없는 곳이다. 지닌 것들을 모두 바람에 날려 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고요히 눈에 쌓인 도시를 바라보며 욕심없이 닭갈비에 소주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이 도시가 이젠 누가 뭐래도 최고다.

이순철 <춘천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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