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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부인 주옥경, 기녀 신분서 여성 운동가로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71년 3·1절 당시 70을 넘긴 가냘픈 할머니가 단상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독립선언서를 거침없이 낭독했다. 중앙청 동쪽 광장(광화문) 3·1절 기념식장에는 박정희 대통령, 이효상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등 3부 요인과 외교사절, 독립유공자, 2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민족대표 33인 유족회를 대표한 주옥경(朱鈺卿: 1894~1982·사진) 회장은 의암 손병희의 미망인으로 28세 때 홀로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절한 여성운동가였다. 수의당(守義堂)이라는 도호(道號)는 바로 ‘의암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도교의 여성운동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와 궤를 같이 한다. 오랫동안 천도교 내수단(內修團)을 이끈 주옥경 여사는 일본에 유학한 엘리트로서 청빈하며 겸손한 일생을 살았다. 손병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자 수의당 주옥경은 형무소 앞 쓰러져가는 초가집을 세내어 지극한 정성으로 손병희의 옥바라지를 했다. 꼬박꼬박 하루 세끼 사식을 만들어 넣는 한편 교파를 가리지 않고 차입비용을 부담했다.

손병희는 옥중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병보석이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치료할 기회를 놓치고 수감된 지 19개월20일 만에야 풀려났다. 주옥경은 한시도 쉬지 않고 병간호를 해서 가족들과 교도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잠시 차도를 보이던 손병희는 1922년 5월 19일 영면하고 만다. 이후로 주옥경은 8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60년간 수절하면서 고결한 여성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원래 종로 명월관의 기생 출신이었다. 평양 근교 숙천에서 태어나 8세 때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간다. 주산월(朱山月)이 그의 기명이다. 그는 몸을 파는 이·삼패(二三牌) 기녀가 아니라 기악과 서화에 능한 일패(一牌) 등급의 예단(藝壇: 연예인)으로서 당시 매일신보 기자는 ‘서화의 천재’라고 평하고 있다. 주산월은 평양에서 서울로 오자마자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인 이른바 ‘무부기(無夫妓)조합’을 만들고 행수(行首)가 된다. 그해 명월관과 그 별관인 태화관을 출입하던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 신도가 된 주옥경은 22세 때 셋째 부인으로 들어간다. 두 사람은 33살의 나이 차가 났다. 이후로 그는 가정과 교단에 헌신한다.

스승처럼 모시던 손병희가 순국하자 주옥경은 일본 유학을 끝내고 돌아와 여성운동에 투신한다. 소파 방정환의 미망인 손용화를 비롯해 손병희의 딸들은 주옥경을 깍듯이 어머니로 모셨다고 한다.

수운 최제우는 링컨이 흑인노예 해방을 선언하던 1863년보다 3년 앞서 두 여종 가운데 하나를 딸로 삼고 다른 하나를 며느리로 삼았다. 해월 최시형은 모든 어린이와 여성을 하늘로 모시고 섬겼다. 의암 손병희는 기생을 부인으로 삼았고 그 부인은 여성운동가로 거듭나 마침내 종법사(宗法師)가 되었다. 사람이 하늘임을 몸소 실천하고 증명해 보인 혁명가들이다.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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