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안기부 리스트' 의혹 밝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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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안기부가 선거자금을 제공한 리스트가 공개되면서 국민적 충격을 주고 있다.

검찰의 1차 조사를 근거로 작성됐다는 이 리스트에 따르면 안기부는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후보 1백83명과 일부 야당.무소속 후보에게까지 선거자금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모두 국가예산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 리스트를 놓고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은 정치음모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민주당은 이의 국고환수를 주장하는 등 야당 공격에 이용하고 있다.

우리는 우선 국가의 예산이 특정 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전용된 사실에 분노와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정보기관이 광범하고 비공개적인 정보수집 능력과 막대한 정보자금을 동원해 정치에 간여함으로써 정치를 왜곡한 폐해는 이미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자행돼 왔다.

그런 폐해를 막기 위해 정치간여를 금지하는 법 조항까지 신설했지만 안기부는 예비비까지 끌어들여 여당에 선거자금을 대주기까지 했다니 이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리스트를 둘러싼 의혹은 철저하게 가려내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우선 가려야 할 것은 리스트의 정확성이다. 검찰이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이 리스트는 당장 보기에도 편파적이다. 당시 대부분의 신한국당 후보에게 지원됐었는데 왜 일부 인사들의 명단은 빠져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신한국당에 소속했다가 그후 탈당해 현재 DJP 공동정부에서 요직을 지내거나 자민련의 당직자라는 이유로 배제했다면 편파시비를 부를 수밖에 없다.

또 현 정부에 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일부 군소정당의 정치인들을 조사대상에서 누락했다면 이는 검찰 조사가 편향적이거나 정치적 수사라는 의혹을 사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검찰 리스트의 정치적 왜곡 가능성에 대한 중립적인 조사가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정치자금 제공대상에 대한 전면적이고 정확한 조사가 조속히 행해져야 할 것이다.

또 예산의 불법적 전용과 안기부의 정치간여 행위를 밝히기 위해서는 자금의 전달 및 배분뿐 아니라 이런 불법행위를 누가 기획하고 누가 허가했는지, 모든 과정이 샅샅이 밝혀져야 한다.

이런 엄청난 예산전용이 안기부의 일개 운영차장의 요청만으로 이뤄질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당시 신한국당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핵심적인 고리역할을 한 강삼재(姜三載)의원이 자진출두해 사건의 경위를 상세하게 밝혀야 한다고 본다.

한나라당이 이런 불법적인 예산전용 행위 자체를 방탄(防彈)국회로 보호하는 것은 명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민주당이 이번 사건을 정치공세의 수단으로 삼아 정쟁을 벌이는 것도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의혹의 불씨만 키우는 치졸한 정략이라고 본다.

국민은 예산의 불법전용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이미 신뢰를 잃고 있는 검찰이 과연 중립적으로 수사에 임하고 있는지, 이번 사태가 정치적 복선을 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혹의 눈초리로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정보기관의 예산전용에 대한 적절한 검증수단이 마련되지 않고 정보기관의 정치간여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끊임없는 정치보복의 고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번 기회에 국가정보기관의 정치간여 행위에 대한 철저한 차단장치와 감사제도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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