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퇴계 이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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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떤 사람이 어진 사람이냐고 제자들이 공자에게 물었다.

"강의목눌(剛毅木訥) 근인(近仁)" 이 공자의 대답이었다. 사욕에 흔들림이 없이 강직하고 어떤 고난에도 의연하며 성품이 허식을 좋아하지 않아 소박하고 말을 아낄 줄 안다면 인 자체는 아니더라도 인에 가까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논어'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얘기다. "교언영색(巧言令色) 선의인(鮮矣仁)" 이라는 공자의 가르침도 있다.

번지르르하게 입에 발린 소리나 하고 얼굴 빛에 아첨이 가득한 사람 치고 어진 이가 드물다는 뜻이니 사람을 쓰거나 사귐에 있어 이런 이를 조심하라는 충고가 담겨 있다.

교언영색을 멀리하고 강의목눌에 다가섬을 수신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동서를 떠나 선현들의 공통된 생활 자세였다.

올해로 탄생 5백주년을 맞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또한 평생을 강의목눌한 태도로 살다간 거유(巨儒)였다.

새해 첫날 아침 KBS는 퇴계가 남긴 가르침의 현대적 의미를 되짚어보는 1시간40분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21세기의 문을 연 신사(辛巳)년 원단(元旦) 벽두를 장식한 '굿모닝, Mr.퇴계' 는 모처럼 공영방송의 소임에 충실한 대형 기획물로 평가할 만하다.

퇴계는 칠십평생 79번이나 관직을 사양할 정도로 출세에는 초연했지만 관직과 아예 담을 쌓고 지낸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고 마지못해 조정의 부름에 응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퇴계는 같은 해에 태어나 조선 성리학의 또다른 일문을 이룬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대조적이다. 남명은 일체의 관직을 멀리하고 오로지 후진 양성에만 힘을 쏟았다.

'부귀는 뜬 구름과 같고, 명예는 나는 파리와 같다' 고 읊조렸던 퇴계는 자기수양과 지식이 부족한 자가 공직을 맡는 것은 국가의 녹을 축내는 도적질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또 청렴한 마음과 도의심으로 매사를 늘 조심스럽게 다루라면서 '경(敬)' 을 강조했다.

공자는 치국(治國)의 첫째 도(道)로 '경사이신(敬事而信)' 을 꼽았다. 삼가고 공경하는 조심스런 마음으로 나랏일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백성의 믿음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퇴계가 강조한 '경' 사상과 맥이 통한다. 신뢰를 저버린 정치꾼들과 자리보전에 급급한 공직자들이 판치는 어지러운 세상이다.

당파싸움으로 날이 새고 탐관오리가 설치던 난세를 향해 퇴계가 던졌던 교훈이 5백년이 지난 오늘도 그대로 유효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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