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밴쿠버] “상화가 달력 2월 16일에 인생역전이라 쓰더니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이상화 선수의 어머니 김인순씨(왼쪽 빨간 옷)와 아버지 이우근씨(아래 안경 쓴 이)가 17일 서울 장안동 자택에서 이상화 선수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기뻐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이상화와 함께 스케이팅을 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운동을 포기한 오빠 상준씨. [연합뉴스]

“자랑스럽다, 우리 딸.”

이상화(21·한체대)가 한국 빙상의 역사를 새로 쓰던 날, 서울 동대문구 장안2동에 위치한 그의 집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부모와 오빠 상준(24)씨의 친구 등 10여 명은 거실에서 함께 TV를 보다 약속이나 한 듯 목청껏 ‘만세’를 외쳤다. 아버지 이우근(53)씨는 재빨리 집 밖으로 나가 빌라(다세대 주택) 입구에 “이상화 금메달”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잠이 오지 않아 밤을 꼬박 새우고 딸의 경기를 지켜봤다는 어머니 김인순(49)씨는 “믿기지 않는다. 금메달리스트는 TV에서만 보는 줄 알았는데 내 딸이 그런 큰일을 해내다니 너무 자랑스럽다. 상화의 태몽이 용꿈이었는데 개꿈은 아니었나 보다”라며 감격스러워 했다. 아버지 이씨는 “경기 직전 통화에서 상화가 ‘모태범 선수와 이승훈 선수가 메달을 따 너무 부담스럽다’고 하더라. 그래서 최선을 다해 준비했으니 마음 편하게 즐기라고 했다. 오늘 경기를 보니 상화 얼굴이 아주 편안해 보였는데 내 조언이 도움이 된 것 같다”며 크게 웃었다.

이상화 부모는 끊임없는 인터뷰 요청에 환하게 웃으며 일일이 응했다. 김씨는 “4년 전 토리노 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한 뒤 상화랑 실컷 울었다. 밴쿠버에 가기 전 상화가 ‘이번에는 꼭 메달을 따서 활짝 웃고 올게요. 메달 따면 엄마도 울지 말고 웃어요’라고 했다. 눈물이 나오려 하지만 딸과 약속한 만큼 울지 않겠다”고 했다.

서울 은석초등학교 1학년 때 쇼트트랙을 시작한 이상화는 3학년 때 참가한 대회에서 선수끼리 충돌해 넘어진 뒤 몸싸움이 없는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했다. 어머니 김씨는 “상화는 휴가 때 집에 와서도 매일 중랑천 둔치를 2시간 이상 달렸다. 다음날 훈련에 지장이 있다며 친구들도 만나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연습벌레”라며 “딸의 이런 자기 관리가 금메달로 보상받은 것 같아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상화가 캐나다로 떠나기 전 ‘메달을 딴 뒤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가자’고 했다. 지금부터 여행 갈 준비를 해야겠다”며 기뻐했다.

이상화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에 집 안 달력 2월 16일 아래에 ‘인생역전’이라고 적어놓은 글귀가 눈에 띈다. 16일은 이 선수의 경기가 열렸던 캐나다 현지 시간. [연합뉴스]

이상화의 방에 걸린 달력 2월16일에는 동그라미와 함께 ‘인생역전’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날은 캐나다 시간으로 밴쿠버 올림픽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 경기가 열리는 날이다. 김씨는 “상화가 달력에 이런 표시를 한 것을 2월이 돼서야 알았다. 상화 뒷바라지를 하느라 넉넉지 못해 좁은 빌라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데, 아무래도 상화가 이 점을 맘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 김씨는 또 “상화가 중학교 다닐 때 캐나다 전지훈련비를 마련하기 위해 은행융자를 받기도 했다. 상화와 같이 스케이팅을 하던 오빠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운동을 접었다”며 우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김씨는 딸의 훈련비를 대기 위해 봉재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침대와 책상, 피아노가 놓여있는 이상화의 방은 21세의 여대생 방치고는 좁아 보였다. 또 책상 위에는 화장품과 액세서리가 아닌 각종 트로피와 메달이 진열돼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 위에는 “언제나 이길 수 있어. 나는 자신 있어”라는 글귀의 액자가 놓여 있었다.

김종력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