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걸 교수의 공공디자인 클리닉 <18> 행정서식, 이해 쉽고 작성 편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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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그러나 국민과 정부 간의 소통을 매개하는 민원 문서서식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작성하기 불편합니다. 각종 행정서식의 사용자인터페이스(UI)를 개선해 행정 업무를 합리화해야 합니다.

◆정보 환경 못 따라가는 행정서식=우리나라의 행정서식은 6000여 종이 있습니다. 법규 문서를 비롯해 고시·공고 등에 쓰이는 공고 문서, 허가·인가·승인·등록·증명에 관련된 민원 문서 등 다양한 행정 문서가 있습니다.

정부는 사무의 간소화·표준화·과학화 및 정보화를 위해 ‘사무관리규정’ 시행령을 제정, 행정서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근 개정안에 따르면 서식의 설계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용어를 써야 하고, 기입 항목의 구분도 간결하게 해 민원인의 편의를 도모해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식이 해방 이후 일부 개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원래의 틀을 그대로 유지해 왔습니다. 현재의 규정과는 동떨어진 모습입니다. 기존 행정서식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시대의 언어감각에 맞지 않습니다. 항목들의 배열 구조는 시각적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관공서 민원실의 서식함 주변에는 수기로 작성한 견본이 있지만 공무원에게 작성 방법을 물어보는 시민이 많습니다.

휴지통에는 잘못 작성해 버린 문서로 가득합니다. 오늘날 상용하지 않는 한자어와 불명확한 언어 사용으로 인해 상당수 국민이 문서 해독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 사무관리규정을 따르지 않은 채 가로·세로쓰기를 혼용해 시선의 흐름을 방해하고, 적어 넣어야 할 정보량을 고려하지 않은 비좁은 공간으로 인해 민원인은 글씨를 깨알같이 적어야 합니다.

더구나 일관성 없는 서체 사용과 그래픽 요소의 배치는 서식을 더욱 복잡하고 무질서하게 만듭니다. 사무관리규정에는 문서 처리 절차가 전자적으로 처리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작은 칸에 흘림체로 쓴 글자들을 전자데이터로 전환할 경우 글씨가 깨지고 뭉개져 판독 오류가 일어나고 문서의 기록 보존 과정에서도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항목들의 배열이 매우 혼란스럽고, 기재할 공간이 비좁은 현재 전입신고서(左). 민원인과 공무원의 기재란을 음영 차이로 구분하고, 적절한 기재 공간을 둔 개선안. 시각적으로 깔끔한 데다 민원인이 이해하기 쉽게 돼 있다(右).

◆불합리한 요소 걷어내야=디자이너 송지성은 민원인·행정공무원·전자장비 모두를 고려한 효율적인 행정서식을 제안합니다. 내용별로 정보를 분류하고, 정보의 위계가 즉각 전달되도록 시각적 구조를 갖춰 민원인이 서식을 쉽게 이해하도록 합니다. 민원인과 공무원의 기재란은 음영 차이를 둬 한눈에 구분하기 쉽습니다. 채워질 정보량을 감안해 적절한 작성 공간을 두고, 글자 및 숫자 기입란에는 안내선을 넣어 한 글자씩 또박또박 쓰도록 유도합니다. 전달에 혼선을 빚지 않도록 한글세대에게 적합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일관된 가로쓰기로 읽기와 쓰기가 모두 수월합니다. 담당 행정공무원도 속독이 가능해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또한 블록 글자체는 전자문서로 변환한 뒤에도 모니터상에서 또렷하고, 문자인식기기의 오류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문서의 기록 보존과 검색에도 효율적입니다.

행정서식의 디자인을 바꾸는 것은 사람의 시지각과 기기의 문서 해독 능력까지 고려해 이뤄집니다. 이 때문에 시민 생활의 편익은 물론 행정 능률 제고와 비용 절감으로 이어집니다.

정부는 민원 문서서식을 개선해 고객 접점에서 국민을 섬기고자 하는 전자정부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권영걸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공간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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