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북정책의 새 틀을 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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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 무산된 것은 김대중(金大中)정부나 김정일(金正日)위원장에게는 무척 아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낙관적 전망 하나만으로 평양을 방문하기에는 너무도 비판적인 미국 내 여론을 감수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미.북 관계개선의 한 전환점을 만들어 보고자 했던 金대통령의 계획은 틀어졌다.

이제 부시 행정부가 대북 정책의 방향을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미.북 접촉은 상당 기간 늦춰질 전망이고 남북관계도 새로운 한.미관계의 정돈을 기다리는 조정 기간에 들어섰다.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클린턴이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평양행에 제동을 건 미국 내의 대북 분위기다.

金위원장의 화려한 국제무대 등장에도 불구하고 미국 여론은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등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의구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미국민들은 그런 상태에서 클린턴의 방북이 북한의 1인체제와 인권 상태를 미국이 공인하는 듯한 효과를 주는 데 대해 비판적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자세도 이런 여론 기조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부시 행정부의 외교팀은 북한의 정치체제나 인권 문제에 대해 보다 단호하고 미사일 개발 문제에 대해 더 강경하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내정자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이 미국에 위협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공화당 쪽 의견을 대변하는 아미티지 보고서 등은 북한에 보다 강경한 조치를 요구한 바 있다.

그들은 김대중 정부가 대량파괴무기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金위원장에게 적절하게 전달하지 않은 것에 언짢아하고 있으며, 확실한 평화적 담보가 없는 성급하고 이벤트적인 대북 접근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 당근과 채찍을 함께 구사하는 페리 프로세스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정책의 속도와 방향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金대통령이 부시 당선자에게 이른 시일 안에 정상회담을 하자고 요청한 것은 정부의 대북 정책을 설득해 보려는 의도로 보인다.

우리는 정부가 부시 행정부를 설득하고 대북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개인적인 업적 쌓기에 치중했던 대북 정책의 틀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북 포용정책은 마땅히 지속해야 한다.

그러나 과속(過速), 산발적이던 대북 이벤트를 제도화하고 정상화하는 데 더 치중해야 하며 대북 정책 추진 체계나 인적 구성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도 미사일 개발을 흥정 수단으로 삼기보다 이를 주도적으로 절제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의 책임 있는 한쪽 당사자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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