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제야의 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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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세기의 마지막 밤을 하루 앞두고 파리 경찰청에 비상이 걸린 모양이다.

뜬 눈으로 새해를 맞이하려는 수십만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샹젤리제의 차량통행이 전면 금지되고, 조금만 수상한 기미를 보여도 곤봉으로 다스리겠다고 경찰은 경고하고 있다.

파리시는 이번 제야(除夜) 행사를 빛과 소리의 축제로 요란하게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

자정을 기해 콩코르드 광장에서 '빛의 교향악' 이 연주되고, 2만개의 전구로 장식된 에펠탑이 파란 불빛을 반짝이면서 축제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같은 시각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에 모인 인파는 올드 랭 사인의 선율 속에 전광판의 줄어드는 숫자에 맞춰 카운트다운의 합창을 시작하고 포옹과 입맞춤으로 21세기의 첫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또 그 시각 서울 종로의 보신각에서 울려퍼지는 33번의 제야의 종소리는 2001년 새해의 시작을 알리게 될 것이다.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해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짐작했다. 당연히 밤에는 시간을 몰라 답답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보신각의 종을 쳐 밤의 깊이를 알려줬다.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이경(二更.오후 10시)에 치는 28번의 종이 인정(人定)이었고, 통행금지가 풀리고 사대문이 열리는 오경(五更.오전 4시)에 치는 33번의 종이 파루(罷漏)였다.

본시 제야의 종은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1백8번의 종을 치는 데서 연유했다. '백팔번뇌' 를 안고 사는 중생들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음력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만 한 해를 마치는 날인 섣달 그믐에는 예부터 궁중이나 민간에서 여러가지 행사와 의식을 행했다.

이날 밤 대궐 뜰에서는 악귀를 쫓는 의식인 나례(儺禮)를 베풀었고, 민가에서는 집안 구석구석 등불을 밝히고 눈썹이 세지 않도록 밤을 새우며 수세(守歲)를 했다.

그 해의 거래관계는 이날로 청산해야 하는 터라 밤중까지 빚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면 정월보름까지는 빚 독촉을 않는 것이 상례였다.

언제는 안그랬겠는가마는 올해도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한 해였다.

구조조정의 진통 속에 제2의 경제위기론이 확산하면서 실업의 불안한 그림자가 서민들 살림을 옥죄고 있다.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그 밥에 그 나물이고, 잘 풀리는 줄 알았던 남북관계도 왠지 불안해 보인다.

어두운 추억과 아픈 기억은 20세기의 마지막 제야의 종소리에 날려버리고 다들 희망과 기대 속에 21세기의 새해 첫날을 맞이하기를 기원해 본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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