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부시에 공개서한 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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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당선자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기고문을 워싱턴 포스트가 25일자로 실었다.

이 기고문에서 고르바초프는 매우 신랄하게 미국 중심적 사고방식을 비판했다. 다음은 요약.

미국이 세계 리더로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미국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한다 해도 지구촌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요구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부시 당선자는 21세기가 미국의 세기가 될 수 있다거나 돼야만 한다는 그 어떤 환상도 버려야 할 것이다.

세계화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에 의한 세계화는 잘못된 것이고 의미가 없으며 위험스럽기조차 하다.

미국 유권자들은 전 세계인의 대다수가 처참한 빈곤과 퇴보 속에 살고 있는 한 안락한 삶을 누리는 자신들의 현상황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난 10여년간 미국은 마치 냉전시대의 전승국처럼 대외정책을 펴왔다. 그래서 결국 국제적인 불평등과 긴장, 그리고 미국을 겨냥한 적대감만 깊어졌을 뿐이다.

미국이 기존 정책을 고수한다면 국제정세는 계속 나빠질 것이다.

현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인도 등 빈곤국들과의 관계 역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또 미국과 전통적인 맹방인 유럽간의 효율적이고 장기적인 협력관계 설정도 가능하지 않다.

이미 미국과 유럽연합(EU) 사이에 수많은 무역분쟁이 발생했으며 이는 상호 이해충돌의 한 증거다.

예를 들면 온실효과를 제한하기 위한 공동정책을 마련하고자 모였던 최근 네덜란드 헤이그 회담에서 미국은 고립됐다.

당시 미국의 입장은 유럽을 포함한 다른 대다수 국가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 합의도출에 실패했다. 이는 미국식 세계경영의 분명한 실패 사례다.

냉전 이후의 시대가 희망을 가져왔지만 이제 그 희망은 사라졌다.

지난 10여년간 미국은 더 이상 냉전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시대의 이념적 노선에 따라 행동해왔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유럽 확대, 유고 위기사태의 처리, 또 소위 '불량국가' 라는 매우 기이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터무니없는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 구축이 포함된 미국의 재무장 움직임 등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군축회담은 냉전이 끝난 뒤보다 냉전 시기 막바지에 더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하다. 싫든 좋든 유럽은 이제 지구상에 새롭게 등장한 강력하고 독자적인 세력이다.

따라서 미국이 유럽을 파트너나 동맹으로서 덜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유럽의 경험은 미래를 위한 교훈으로 활용돼야 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과 유럽이 정말로 동등한 파트너 관계를 맺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최근 수년간 미국과 러시아 관계가 악화일로에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한 책임은 러시아와 미국 지도자들이 나눠 져야 한다.

현재 러시아 지도층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미국과 협력할 준비가 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시 당선자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불분명하다.

지난 미 대선 때 러시아와 관련한 부시 당선자의 발언들은 그리 고무적이지 않았다. 진정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과 유럽의 결속은 러시아의 적극적인 역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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