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실향민’ 11년 만의 귀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IMF 실향민’ 권씨가 대구의 가족에게 줄 선물 박스를 어깨에 메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11년 만에 고향의 어머니를 뵐 수 있다는 기대와 죄송함이 엇갈린 때문인지 얼굴이 밝지만은 않다. [김경빈 기자]

‘권씨’는 오늘 고향으로 내려간다. 11년 만이다. 그는 ‘IMF 실향민’이다. 한때 그는 대구 도자기 공장 ‘권 사장’이었다. 직원만 35명이었다. 외환위기 여파로 주문이 끊기고 재고만 쌓였다. 1998년 8월 부도가 났다. 아내와도 이혼했다. 99년 3월 그는 재기를 다짐하며 대구를 떠났다. 이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84세 노모와 세 자녀를 본 것도, 7남매의 맏이인 그가 형제들과 함께 설을 쇤 것도 너무 오래전 일이 돼 버렸다. 권씨는 “가족에게 폐가 될지 모르니 이름은 신문에 안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권씨를 11일 오후 8시 서울 망우동 ‘구세군자활주거복지센터’에서 만났다. 그가 사는 곳이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예순여섯 그의 표정이 어린아이 같다.

-기분이 정말 좋으신가 봐요.

“어무이(어머니) 만날 생각을 하니까 밤에 설레서 잠이 안 옵니더. 하늘에 붕 뜬 기분 같고…. 막 가슴이 벅차고, 눈물도 나올라 하고….”

-고향에 있을 땐 설 연휴를 어떻게 보내셨어요.

“다~ 모였지요! 온 식구들이 장남인 우리 집에서 북적북적 즐거웠지요. 우리 7남매가 자식들 다 데려오면 스무 명도 넘습니더. 술 한잔에 고스톱도 치고. 편 갈라서 윷놀이도 하고. 지는 쪽이 돈 내서 같이 외식도 하고(웃음).”

-고향 떠난 다음엔….

“설에 말입니까? 공사판 쪽방에서 혼자 소주 먹었습니더.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집 떠나고는 해마다 명절이면 그랬습니더.”

-왜 11년 동안이나 고향에 안 가셨나요.

“그게…. 뭐라도 좀 마련해가지고 떳떳하게 가고 싶어서…. 어무이도 좀 보태드리고 싶고.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한참 침묵하던 권씨가 입을 열었다. “아직 간다고 전화도 못 드렸습니더. 10년 넘게 전화 한 통 없다가 이제 와서 염치가 없어 가지고. (고개를 숙이며) 직접 가서 말씀 드려야지요. 못난 자식 용서해 달라고.”

권씨가 보여준 통장 사본. 가족과 함께 살겠다는 희망을 안고 한 푼 한 푼 모은 것이다.

권씨의 어머니는 미혼인 막내딸(49)과 살고 있다. 전에는 권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지난해 5월 그는 공중전화로 여동생에게 어머니의 안부를 확인했다. 건강하시다 했다. 10년 만에 처음 건 전화였다. “가족들이 사람 찾는 광고까지 냈었다”며 동생은 울었다. 권씨는 끝내 어머니와 통화하지 않았다.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놀라 기절하실까 봐, 찾아 나서실까 봐.

고향을 떠난 것은 일자리가 없어서였다. 부도 낸 사업자에게 주던 공공근로 일자리조차 6개월 만에 떨어졌다. 이를 악물며 서울과 경기도 등의 공사판을 전전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7년 만에 은행 빚을 다 갚았다. 권씨는 기자에게 “전 신용불량자는 아닙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2008년 말부터 건설 경기가 나빠졌다. 공사판 일자리도 사라졌다. 권씨는 2009년 1월 무작정 서울시청 복지국으로 찾아갔다. 제발 일자리 좀 달라는 그에게 시청에서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구세군자활센터를 소개해줬다. 숙식이 해결됐다. 지난해 10월엔 안정된 일자리도 구했다.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희망이 생겼다.

-직장 구하고 나서 고향 갈 결심을 한 건가요.

“예. 몇 푼 안되지만 이제 여유가 있다 아입니까. 어무이한테 선물이라도 들고 갈 수 있게 됐습니더.”

-어머니 선물은 뭐 사셨어요.

“아직 못 샀습니더. 가족들 선물은 마련했는데. 어무이 선물은 여러 사람한테 물어봐도 다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연세 드신 분들은 뭐 좋아하시는지 백화점 가서 물어볼라고요. 20만원 정도면 선물 하나 살 수 있겠습니꺼.”

20만원은 권씨의 두 달 생활비를 훌쩍 넘는 돈이다. 그는 센터와 직장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출퇴근 차비를 아끼려고 왕복 1시간 넘게 걷는다. 월급은 80만원 정도지만 3개월 만에 200만원가량을 모은 비결이다. 우선 500만원 저축이 목표다. 임대주택 신청을 위해 필요한 돈이다.

“둘째 아들(32)이랑 막내딸(28)이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서울에서 고생하고 있다 하대요. 지난해에 애들 엄마도 저 세상에 가고…. 그 소식 듣고 숨이 콱 막힙디더. 못난 남편이라 미안하고, 우리 애들 내가 돌봐야지 싶고…. 내가 돈 열심히 모아서 임대주택 받아가지고 자식들이랑 같이 살려고요. 내 월급으로 식비도 대고 하면 애들이 결혼 자금도 모을 수 있을 겁니더.”

맏아들(34)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손자의 나이도, 이름도 권씨는 모른다.

-어떻게 자식들한테도 연락을 안 했나요.

“염치가 없어서 연락을 못했습니더.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부모가 돼서 해준 게 없는데. 딸내미가 내가 집 나올 때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결국 학교 그만뒀다 합디다. (목이 메며) 가슴이 찢어지지요. 부모를 원망 안 하겠습니까. 제가 먼저 연락 못합니더.”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잖습니까.

“아입니다(아닙니다). 그것만 하고 어찌 부모라 하겠습니까. 나는 내 도리를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할 겁니더. 재회해서 한번 살아볼랍니다. (수줍게 웃으며) 우리 딸이 좀 이쁩니더. 시집 보내야지요. 그게 부모가 할 일이지요.”

-자녀들과 함께 살면 뭘 하고 싶나요.

“같이 저녁만 되면 만나고 얼굴 보는 거. 그냥 얼굴만 봐도 배가 안 고플 것 같아요. 혹시 이제는 나하고 안 산다고 할까 봐 그게 두렵습니더.”

-설에 가면 자녀분들도 와 계시지 않을까요.

“…사실은 그런 기대도 합니더. 우리 애들이 할머니 집이라고 오지나 않을까. 만약 만나게 되면…. 우리 손자, 안고 싶어요. 한 번만 안아주고 싶어요.”

권씨는 “ 식구들하고 연락은 끊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했다.

-다른 ‘IMF 실향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직 안 늦었습니더. 정신만 차리면 됩니더. 식구들한테도 연락하이소. 저는 이제 괜찮습니더. 숙식도 해결됐고 직장도 있고 돈만 열심히 모으면 됩니더. 임대주택도 나올 거고 자식들하고 함께 살 거란 희망이 있습니더. 저처럼 예순여섯 나이에도 하는데, 포기만 안 하면 됩니더.”

-고향 가길 주저하는 분들도 있는데.

“고향에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꼭 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더. 적어도 명절만큼은 식구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십시오. 제가 10년 넘는 세월 동안 뼈저리게 느낀 겁니더. 꼭, 꼭 가십시오.”

그는 오늘 고향으로 간다. ‘어무이’ 보러 간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