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북에 전력 줄 여건 마련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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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평양에서 열렸던 네번째 남북 장관급회담은 올해의 남북대화를 결산하고 내년의 남북관계를 전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됐으나 국민이 기대하는 남북대화의 본궤도에는 접근도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양측이 내년도 일정으로 대체로 합의한 것을 보면 이산가족의 생사확인과 편지교환을 시범적으로 실시하고, 올해 못했던 이산가족 3차 상봉을 실시하며 북측의 한라산 관광단이 남한에 온다는 것, 태권도 교류 등이다.

이런 것들은 이미 여러차례 지적했듯이 이벤트성 교류에 불과하며 면회소 설치나 이산가족간의 전면적인 생사확인.서신교류 등은 미뤄지고 있다.

게다가 북측은 우리 국회가 결의한 납북자나 국군포로의 송환에 관한 결의문 접수를 거부했으며 가장 중요한 군사적 긴장완화나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것들은 전혀 의제로 상정되지도 않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 회의에서 북측은 전력공급 문제를 남북간 정식의제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

양측은 이 문제로 줄다리기하는 시늉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이 문제를 포함한 개성공단.남북 어업협력 문제 등을 협의할 경제협력추진위를 연내에 열기로 함으로써 북측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을 뿐이다.

북측이 요청한 전력공급량은 총 2백만㎾이고 우선 50만㎾로 알려졌다. 현재 북한이 극심한 전력난에 허덕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를 지원하는 방안 역시 간단치 않다.

우선 어떤 방식으로 공급할지도 문제이고 지원자금이 적게 잡아도 수천억원, 많게는 조단위에 이르기 때문에 조달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이런 막대한 경제지원을 하려면 우리 내부의 경제적 여건을 감안해야 하며 특히 긴장완화 등 북측의 성의있는 자세가 보여야 그나마 국민의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성급하게 또는 비밀스럽게 이 문제를 처리하려 한다면 정부는 큰 부담을 안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해놓고도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은 '이제 북한에 퍼준다는 말은 못할 것' 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부 대표단이 남북대화에 관한 국민의 기대나 요구사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회의 벽두 북측 대표들에게 북측의 약속 불이행을 지적하고 주적(主敵)문제에 대한 북측 시비에 몇마디 반박한 것으로 마치 그동안의 저자세를 탈피하고 '당당하게' 북측과 대화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정부의 남북문제에 관한 인식수준이 이 정도인지 정말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산가족 상봉 일자나 적십자회담 일정을 협의하는 수준의 남북 장관급회담이 앞으로도 필요한 것인지 묻고 싶으며 남북 긴장완화 문제와 동떨어진 현재와 같은 대북정책은 기본발상이나 인적 구성에서 근원적으로 수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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