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업자와 환전상에 보내는 화가들의 야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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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호 08면

1 성전에서 상인과 환전상을 몰아내는 그리스도(1650), 야코프 요르단스(1593~1678) 작, 캔버스에 유채, 288x436㎝, 루브르 박물관, 파리

중세 미술의 거장 조토 디 본도네(1266?~1337)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벽화 중에 놀라운 그림이 하나 있다(사진 2). 예수가 무서운 눈초리로 채찍을 휘두르며 그림 오른쪽에 있는 두 남자를 때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온화하고 자비로운 이미지에만 익숙한 이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오른쪽에 턱수염이 난 남자는 놀라 어쩔 줄 모르며 두 손을 들어올린 반면, 턱수염이 없는 젊은 남자는 두려우면서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한 손만 들고 있다. 그의 나머지 한 손에는 빈 새장이 들려 있고, 그의 발 밑 우리에서는 양이 놀라 뛰쳐나가고 있다.

문소영 기자의 명화로 보는 경제사 한 장면 : <1>성전에서 상인과 환전상을 몰아내는 그리스도

그림 왼쪽에는 어린아이들이 겁에 질려 예수 제자들의 품에 숨어 있다. 비둘기를 가진 한 아이는 원근법의 미숙으로 마치 제자의 의상 무늬처럼 보이게 돼 버렸다. 하지만 나머지 한 아이가 다른 제자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모습과 그 제자가 아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는 모습은 참 생동감 있게 묘사돼 있다. 역시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들의 선구자가 된 조토의 솜씨라 할 만하다.

2 성전에서 상인과 환전상을 몰아내는 그리스도(1304~1306), 지오토 디 본도네(1266?~1337) 작, 프레스코, 200x185㎝, 스크로베니 경당 벽화, 파두아3 성전을 정화하다(1600), 엘 그레코(1541~1614) 작, 캔버스에 유채, 42x52㎝, 프릭 컬렉션, 뉴욕

그런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장면일까? 새장과 우리는 왜 있는 것이고, 예수는 왜 어린아이들이 겁에 질릴 정도로 거친 모습인 것일까? 이 장면은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고 꾸짖으셨다” (요한의 복음서 2:13-17)
그렇다면, 예수에게 혼이 나고 있는 남자들은 가축 상인과 환전상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예수가 그토록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전에 궁금한 것은 왜 신성한 성전 안에 이런 장사꾼과 환전상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일까?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유대인들은 정기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나 양, 비둘기 등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런데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그런 동물들을 끌고오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레위기의 기준에 따라 희생제물로 적합한지 판정을 거치는 골치 아픈 절차도 밟아야 했다. 그래서 결국 성전 바로 앞에서 기준에 맞는 동물들을 파는 상인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 장사가 성행하면서 그들은 성전 안으로까지 비집고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또한 축일에 참석하는 유대인들은 성전 유지를 위한 헌금을 내야 했다. 외지에 사는 많은 유대인은 외국 돈만 보유하고 있었지만 성전에서는 외국 돈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성전 앞에서 환전이 성행하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환전상들도 성전 안으로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문제는 이들 환전상이 높디높은 수수료를 받았고, 희생제물용 가축 장사꾼들도 마치 졸업식장 일부 꽃 행상이나 해수욕장 일부 빙과 행상처럼 바가지를 톡톡히 씌웠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전 앞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렸기에, 즉 경쟁자가 없었기에 그런 바가지가 가능했다.

그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할 일은 없었을까? 이들 상인 중에 누가 나서서 “저는 레위기의 엄정한 기준에 따른 흠 없는 숫양을 20% 싼 가격에 드립니다!”라고 한다면 모든 성전 참배자가 그에게 몰려들어 대박을 치게 되었을 텐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상인들 사이에는 가격 담합이 형성되었고 저가 정책을 써서 담합을 깨는 자는 성전에서 퇴출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담합의 뒤에는 바로 성전 관계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상인들이 성전에 들어오려면 성전 관계자들의 묵인이 있어야 하는 데다 어느 희생제물이 레위기 기준에 맞는지는 결국 성전이 판단한다. 성전 관계자들은 성전 상인들의 장사와 담합을 보장하며 그 이익의 한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라고 한 것은 그저 성전에서 행상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이런 뒷거래를 가리킨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해수욕장의 바가지 아이스크림은 참고 안 사먹으면 그만이지만, 유대인들은 의무적으로 희생제물을 바치고 헌금을 해야 하니, 이를 볼모로 한 가격 담합은 특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예수가 그토록 거칠게 분노할 만도 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종교적 색채가 아니라면 공정거래위원회에 걸기에 매우 알맞은 그림이 아닐까 싶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여러 불공정 행위들을 감시하지만, 흔히 반독점기구(antitrust agency)라고 불리는 것처럼 독점과 담합에 대한 감시의 의무가 그중 첫째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내는 장면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에게도 인기 많은 소재였다. 인물을 길쭉길쭉하고 병적으로 창백하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에스파냐의 독특한 화가 엘 그레코(1541~1614)의 작품 중에도 이 장면을 다룬 그림이 있고(사진 3),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플랑드르의 화가 야코프 요르단스(1593~1678)(사진 1)의 작품 중에도 이 장면을 그린 것이 있다.

이 중 요르단스의 그림을 보면 바로크 시대의 그림의 특징대로 화면이 장려하고 수많은 인물과 동물이 격렬한 동세로 서로 얽혀 있다. 가축 상인들은 그리스도의 채찍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고 오른쪽에는 통쾌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화면 중앙에서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넘어지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나이다. 그의 옆으로는 여러 종류의 동전이 쏟아지고 있고, 장부도 흩어져 있어서 그가 환전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바로크 시대 화가들이 이 장면을 즐겨 그린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소재 자체가 드라마틱하고 격렬해서 바로크 화가들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환전상에 대한 야유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 그림의 배경인 예수의 시대에도, 그리고 이 그림이 그려진 17세기까지도 환전상은 현대처럼 순수하게 환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금융 관련 일을 겸하고 있었다. 특히 화가 요르단스가 활동하던 17세기 플랑드르에는 상업과 무역의 발달 속에 환전상들이 활약하며 환전뿐 아니라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는 대부업을 겸하고 있었다. 이자를 받는 것에 대한 중세적인 부정적인 시각과 새로운 긍정적인 시각이 혼재하던 이 시기에 여전히 많은 화가가 대부업을 겸한 환전상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관한 다른 그림들과 이자를 받는 것이 죄악인가에 대한 논란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소개할까 한다.



영자신문 중앙데일리 문화팀장. 경제학 석사로 일상 속에서 명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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