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부시정부가 되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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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은 축복받은 나라다. 10년 전에 소련이라는 주적(主敵)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경제가 8년째 장기호황을 누리면서 미국 사회는 타성에 빠졌다.

양당제도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정치는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로 생각됐다. 플로리다에서 개표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던들 미국은 행복한 깊은 잠에서 깨어날 계기를 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플로리다의 충격으로 미국은 타성의 잠에서 깨어나 대내적으로는 대선에서 드러난 헌법상의 모순을 정비하고, 대외적으론 유일한 슈퍼파워의 역할에 대한 정의(定義)를 다시 내려 군사력과 경제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던 지난 반세기와는 달리 인터넷 문명으로 새 천년을 주도할 준비를 할 것이다. "역경의 은총" 이다.

민주당의 앨 고어는 공화당의 조지 부시보다 전국득표에서 33만표를 앞서고도 플로리다에서 25명의 선거인단을 놓쳐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플로리다에서의 고어와 부시의 득표차는 2백표 미만으로 공식 집계됐다. 선거는 무승부나 다름없지만 우여곡절 끝에 내년 1월 20일 대통령에 취임하는 차기 대통령의 이름은 조지 부시일 것 같다.

이런 사정은 부시 대통령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고 정책방향을 크게 선회시킬 것으로 보인다. 부시는 대권을 위임받지 않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최고 브레인의 한사람으로 클린턴 1기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브렌다이스대학)교수는 부시 정부를 "클린턴 없는 클린턴 3기정부" 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부시 정부가 전통적인 공화당의 정책을 수행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다.

부시와 고어의 대결은 신자유주의와 사회적(social)자유주의의 대결이었다. 중도를 중심으로 부시의 우파노선은 레이거니즘의 그것으로 분명한 시장과 경쟁원리에 따라 결과적으로 가진 자에게 유리한 것이다.

평등보다는 자유가 우선이다.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다.

고어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사회.경제정책에 케인스주의를 가미해 패자(敗者)와 약자들에게 지원의 손길을 보내는 노선이다.

고어는 미국인들이 결과의 평등은 아니라도 기회의 평등은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사회복지정책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근로자.노인.소수민족이 고어를 지지한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제로에 가까운 득표차와 대선의 내용으로 봐서는 고어가 이긴 것 같다는 사정은 부시한테서 전통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할 자유를 대폭 박탈할 것으로 보인다.

라이시 교수는 권력의 중심이 중도로 이동해 앞으로 4년 동안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들이 미국 정치의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부시 대통령이 큰 문제에 관한 입법을 주도할 여지가 극도로 줄어든다는 말이다.

이런 전망이 정확하다면 부시 행정부에서 북.미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북.미관계의 후퇴가 걱정된다.

올 하반기에 클린턴 정부는 북.미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전기(轉機)를 잡았다. 북한의 미사일과 테러지원문제에 해결방도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은 북한을 불신한다. 공화당은 북한에 철저한 상호주의를 요구한다. 미사일문제 해결로 6백억달러 규모의 국가미사일방위(NMD) 개발의 명분을 잃는 사태도 반갑지 않다.

부시 정부가 북한에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적극적인 이니셔티브를 포기하는 무위(無爲)의 정책으로 나가면 그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후퇴를 의미한다.

대북정책에 관한 한.미 공조에는 이런 이해관계가 참작돼야 한다. 정부 상대의 외교만으로는 안된다.

한국의 전문가집단은 그들의 미국 카운터파트들을 상대로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 추구를 견제하면서 미국의 이해를 지키는 데 북.미관계 개선이 필수적인 조건임을 납득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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