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한국·중국·일본 바둑계 판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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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한국에선 4인방의 철옹성이 무너졌고 일본에선 부동의 1인자 조치훈9단이 무관으로 전락했다.

중국은 마샤오춘(馬曉春)과 창하오(常昊)의 뒤를 저우허양(周鶴洋)등 신인들이 덮쳤다.

한국, 중국, 일본 3국에서 타이틀보유자가 똑같이 6명으로 늘어나며 거의 같은 시각에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2000년 바둑계는 그리 떠들석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지난 10여년간 묵은 체제가 크게 뒤바뀌는 조용한 혁명을 겪었던 것이다.

▶한국 2바둑계는 여성강자 루이나이웨이(芮乃偉)9단이 세계최강 이창호9단과 바둑황제 조훈현9단을 연파하고 '국수' 를 따내는 대이변 속에서 한해를 시작했다.

이 흥분은 곧바로 이세돌3단의 32연승으로 이어졌고 이같은 신인들의 대약진에 밀려 4인방은 예전에 볼 수 없던 침체된 모습을 보였다.

이창호9단은 왕위.기성.명인을 방어하며 꾸준히 1인자의 모습을 보여줬으나 타이틀전에서 신인들에게 종종 덜미를 잡히며 과거의 '무적' 이미지가 많이 엷어졌다.

바닥까지 밀렸던 서봉수9단은 의외로 분발했으나 조훈현9단과 유창혁9단은 깊은 슬럼프에 빠져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초단-4단까지의 10대 또는 20대 초반의 기사들이 대거 밀고올라와 4인방의 영역까지도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과거의 판도는 완전히 파괴되고 누가 어느 칼에 맞을지 모르는 혼전이 이어졌다.

이 속에서 최명훈7단이 LG정유배에서 우승하고 이세돌3단이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우승하면서 군웅할거의 안개속 판도가 형성됐다.

▶일본에선 4년 연속 대삼관(大三冠)에 빛나는 8시간 바둑의 최강자 조치훈9단이 왕리청(王立誠)9단에게 랭킹1위 기성(棋聖)을,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9단에게 랭킹2위 명인을 빼앗기면서 졸지에 무관이 됐다.

때마침 조선진9단도 왕밍완(王銘琬)9단에게 랭킹3위의 본인방(本因坊)을 내줘 일본바둑계는 한국세가 지배하던 '조조(趙趙)시대' 에서 대만세가 지배하는 '왕왕(王王)시대' 로 넘어가게 됐다.

그러나 연말 유시훈7단이 10단 타이틀보유자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9단으로부터 '천원' 을 빼앗고 조선진9단도 기성(棋聖)전에서 도전권을 잡아 한국세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전체적으로는 일본도 '조치훈의 퇴진과 함께 신예 야마시타 게이고(山下敬吾)7단이 기성(碁聖)을 따내는등 '타이틀보유자가 6명이나 돼 역시 군웅할거의 전국시대로 접어든 인상이다.

▶중국은 30대의 마샤오춘9단과 20대의 창하오9단이 랭킹1위 자리를 주고받는 각축전을 벌여왔다.

그러나 올해 저우허양8단이 창하오를 일축하고 기성을 빼앗으면서 간발의 점수 차이로 랭킹1위에 올라서는 바람에 일단 '3강시대' 가 형성됐다.

그러나 이후 사오웨이강(邵□岡)9단이 NEC배에서, 뤄시허(羅洗河)8단이 전국개인전에서 각각 패권을 차지한데다 딩웨이(丁偉)7단이 CC-TV배에서 우승해 중국 또한 내년도의 판도를 도저히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세계바둑 전체로 볼 때 최강자는 여전히 이창호9단이지만 한국의 이세돌3단, 일본의 왕리청9단, 중국의 저우허양8단 이 세사람이 새로운 도전자로 등장한 형국이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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