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출구전략 ‘백신주사’ 놓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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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시장에 고강도 ‘면역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금융위기 수습을 위해 도입한 비상조치를 거둬들이는 출구전략 시행에 앞서 시장의 적응력을 높여두자는 것이다.

그는 10일(현지시간) 하원 금융서비스 위원회에 출석해 하반기 경제 전망과 통화정책 방향을 설명할 예정이다. 의장직 연임 후 처음 의회에 출석하는 그는 FRB가 구상 중인 출구전략의 청사진을 공개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 저널(WSJ)이 8일 전했다.

FRB가 선택할 수 있는 핵심 카드는 시중은행이 FRB에 맡기는 초과 지급준비금에 높은 이자를 주는 방안이 될 전망이다. 시중은행은 고객의 갑작스러운 인출 요구에 응할 수 있도록 예금 중 일정 부분을 지급준비금으로 중앙은행에 맡기도록 돼 있다. FRB는 이를 지렛대로 시중자금을 조절할 수 있다.

원래 FRB는 이 돈에 이자를 쳐주지 않았다. 그런데 2008년 10월 미 의회는 의무적으로 쌓아야 하는 액수를 초과하는 지준금에 대해선 FRB가 이자를 줄 수 있도록 했다. FRB가 초과 지준금에 높은 이자를 쳐주면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은행이 여윳돈을 FRB에 더 많이 예치하게 돼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효과를 낸다.

물론 FRB는 제로 수준인 정책금리를 손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겨우 살아나고 있는 경기회복의 불씨를 자칫 꺼뜨릴 수도 있다. 이에 비하면 초과 지준 금리를 올리는 건 시장에 FRB의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FRB가 보유한 채권을 시중에 내다팔아 돈을 빨아들이는 것도 유력한 대안 중 하나다. FRB는 그동안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증권이나 국채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중에 돈을 풀어왔다. 이를 3월 말까지 대부분 마무리하기로 한 데 이어 거꾸로 채권을 팔아 시중 돈을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FRB 이사인 제임스 불라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8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올 하반기 중 시장 반응을 살펴가며 보유 채권을 조금씩 매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FRB는 그동안 채권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바람에 2조 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하게 됐다. 그러나 보유 중인 모기지 증권을 잘못 팔았다가는 안 그래도 어려운 부동산 시장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다.

이 때문에 모기지 증권 매각은 출구전략 중에서도 우선순위가 뒤로 밀릴 공산이 크다. ‘구두 개입’도 FRB의 중요한 정책 수단이다. 월가에선 FRB가 출구전략을 당장 실천에 옮길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출구전략의 조기 실행은 지난주 말 G7(선진 7개국) 회의에서의 합의와 배치된다. G7은 “당분간 경기부양책을 지속한다”고 결의한 바 있다. 경제 여건도 좋지 않다. 유럽발 위기로 달러화는 연일 강세다. FRB가 금리를 올리면 달러 강세는 가속화할 공산이 크다. 이는 버락 오바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수출 촉진 정책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유럽 위기로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고 있는 것도 출구전략의 조기 착수에 부담이 되는 변수다. 이 때문에 버냉키 의장이 출구전략 청사진을 들고 나오는 건 시장이 적응하도록 면역주사를 놓기 위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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