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만남-다시 이별 '상봉 증후군' 심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 50년 만의 혈육상봉 행사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짧은 순간의 만남과 재(再)이별은 당사자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후유증을 남겨주고 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상봉보다는 그 이후가 더욱 중요하다" 며 이산가족 자신과 그 주변의 정성스런 관리를 강조하고 있다.

지난 8.15 1차 상봉 이후 한 노인은 갑자기 치매를 앓기 시작해 가족들이 적십자병원에 "제발 살려달라" 며 하소연해 오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상봉 이후 적십자병원측이 상봉가족 60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일부는 건강상태가 호전된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가 불면증.정신적 상실감 등 '상봉 증후군' 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 한반도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유형의 병인 셈이다.

1.2차 상봉의 평양방문단 진료를 담당했던 적십자병원의 이수진(李洙眞.38)심장내과 과장은 "상봉을 마친 고령 이산가족의 경우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느냐는 허탈감.상실감에 시달리게 된다" 고 분석했다.

연세대 의대 전우택(全宇鐸.39.정신과)조교수는 "죽은 줄 알고 제사까지 지냈던 가족들을 만난 뒤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재현되면서 가족의 죽음에 대한 '애도반응(哀悼反應.mourning process)' 이 반복되는 증상에 시달리게 된다" 고 진단했다.

증상이 심해질 경우 마치 상봉했던 장면이 '꿈속의 장면' 처럼 기억되고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1~2년 뒤에는 가성 치매로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때문에 상봉 당사자는 물론 가족의 철저한 사후관리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 李과장은 "양측 가족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자녀.직업 등 많은 성취를 이뤄냈다는 긍정적 사고가 필요하다" 고 처방했다.

全교수는 이와 함께 "가족을 못 만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는데 얼굴이나마 보게 돼 기쁜 일이었다는 점을 주변에서 강조, 지적해줘야 한다" 고 조언했다.

이번에 평양을 찾았던 남측 이산가족 1백명은 정신적 충격과 함께 변비.설사.호흡곤란 등 각종 신체적 증상을 호소했다. 채훈묵(81)할아버지는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지는 바람에 이마를 10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정신적 충격에 수반되게 마련인 고혈압.당뇨.천식.심장병 등의 지병악화 방지를 위한 철저한 관리도 중요하다" 고 입을 모았다.

최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