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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처럼 만화처럼…고단한 우리 삶에 대한 송가

중앙선데이

입력

이번엔 만화입니다. “애걔~” 하는 분이 있을지 몰라얼른 덧붙입니다. 보통 보던 만화하고 다릅니다. 그러니까 한 번 보고 쓱 치워버리는 그런 ‘망가’가 아니란 겁니다. 우리가 흔히 “만화 같다” 할 때의 그런 허황된, 또는 좋게 말하면 상상력 넘치는 지어낸 이야기는 없습니다. 대리만족을느끼기는커녕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가슴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림도 다릅니다. 눈 크고 머리 색깔은 노랑ㆍ파랑인 국적 불명 주인공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머리는 조막만 하고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어 외계인을 연상시키는 ‘미남미녀’도 보이지 않습니다. 굵은 G펜으로 꾹꾹 눌러 그은 듯한 선이 모여 팍팍한 우리네 삶을 그려냈습니다.
채민이라는 작가의 『그녀의 완벽한 하루』(창비)란 단편만화집 이야깁니다. 처음 책을 봤을 땐‘어, 창비가 만화책을?’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더랬습니다. 창비가 어떤 출판사던가요. 50대 넘긴이들 중 그래도 젊은 시절 좀 깨어 있었다 하는 이들 거개가 ‘창비 세례’를 받았다 할 정도의 출판사 아닙니까.
그래서 펼쳐들었죠. 물론 ‘창비스러운’ 책이었습니다. 훌훌 넘겨 보고 쓱 치워버릴 책이 아니라곱씹어 볼 만한 책이었다는 거죠. 책은, 만화가 아니라 만화시(詩)입니다. 9편의 시를 골라 이야기를 만들어 냈거든요. 더러 시도되었던 문학의 만화화가 주로 소설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시를 바탕으로 흡인력 넘치는 이야기를 빚어낸 것이우선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그 솜씨가 여간 아니었습니다. 하긴 첫 구상이 2005년, 첫 작품이나온 것이 2006년이고 작품집은 2009년에야 완성했을 만큼 공을 들였다니 그럴 만합니다.
기형도 시인의 ‘가는 비 온다’를 녹여낸 ‘비 오는 날’을 볼까요. 동사무소에서 복지직으로 근무하는 강희정이 주인공입니다. 오래된 연인과 감정도 애착도 없는 연애, 출구 없는 일상과, 그가 돌보는 독거 할머니가 TV를 켜 놓은 채 모로 누워 죽는 ‘사건’을 겹쳐 놓았습니다. 당연히 남루하고,팍팍하고 구질구질하죠. 그런데 그 이야기가 묘하게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듯”이라는 시구처럼 우리네 일상과 비슷해서일까요. 아니면 사실은 자기도 모르게 “바짓가랑이가 젖어가는” 데도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지적하는 잘난 ‘우산을 쓴 친구들’이 맘에 걸려서인지도 모릅니다.
9편의 주인공은 ‘상사몽’을 제외하곤 모두 젊은 여성들입니다. 책에는 이렇다 할 악인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들의 삶은 고단합니다. 살던 집이 철거될 형편인 백화점 판매원, 우유부단한 남편과 강압적인 시어머니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하는 주부, 출구 없는 삶에서 일탈을 꿈꾸는 출판사 편집자 등이죠.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살은 온다”는 최승미 시인의‘삼십세’가 떠오르는 이들입니다.
어쩌면 칙칙한 이야기들이어서 꺼릴 수도 있습니다. 절로 ‘내가 그런 건 아니야’ ‘내 탓은 아니거든’ 하는 생각이 들게 하니까요. 하지만 9편의 좋은 시를 만나는 기쁨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 있습니다. 누가 아나요. 내 불행에 대한 가장 큰 위로는 타인의 불행이란 속설을 체험한 끝에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지.

김성희 기자의 BOOK KEY: 만화 『그녀의 완벽한 하루』


경력 27년차 기자로 고려대 초빙교수를 거쳐 출판을 맡고 있다.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 『맛있는 책읽기』등 3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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