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느림에 대한 성찰 유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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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현재 열리고 있는 문화 이벤트중 가장 폭넓은 사회적 울림을 주는데 성공한 것을 꼽자면, 단연 이철수 판화전 '이렇게 좋은 날' (16일까지 아트 스페이스 서울, 학고재)을 지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지난 28일 오후 오픈 행사에는 시인 고은, 소설가 조세희 등 미술과 직접적인 연분이 없는 인사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이런 풍광을 작가의 교유 폭이겠거니 가늠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 이상이다.

기자는 이것을 미술 언어를 넘어선 의사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지난 토요일 오후, 우연히 스쳐가 본 화랑은 관람객들로 발 딛을 틈도 없었다.

구입한 도록에 사인 받으려는 길다란 줄도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판화 값이 저렴해서 일까? 분명 그만도 아니다.

아마도 그런 반향이란 이철수 판화 고유의 선미(禪味)에 대한 은근한 이끌림일 것이다.

이철수 판화는 80년대 민중판화 운동의 스타 오윤의 찌르는 듯한 분위기가 보다 다듬어지면서 삶과 밀접해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철수 식 선적(禪的)인 맛이란 뭔가 탈속(脫俗)한 듯 툭 트인 분위기, 그런 것에 대한 속 깊은 공감으로 연결된다.

문제는 왜 최근들어 그것이 각광을 받는가? 우리 사회심리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꽉 짜인 삶에 대한 반작용이 숨어있다. 정신없이 쌓아올려온 우리 근현대의 모더니티에 대한 피로도 현상 내지 반성이다.

희안하게도 올해 출판계의 한 중요한 특징도 그것과 닮은꼴이다. 유난히 올해는 느림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신간이 수십여종 쏟아졌고,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등 베스트셀러가 나왔다.

이런 책은 기본부수가 거뜬히 소화되는 특수(特需)현상을 연출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정신없이 달려왔던 관성을 한번 제어해보고 싶은 사회 저변의 심리는 출판.미술.음악 등 문화예술의 장르 구분과 상관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실은 그런 현상은 본질적으로 '시간 예술' 인 음악에서 보다 뚜렷했다. 음반 시장의 경우 2-3년 전부터 지휘자 카라얀, 정명훈등이 녹음한 음악의 편집앨범 '아다지오' 류(類)가 폭넓은 반향을 얻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구체적인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철학자 이정우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질 들뢰즈 같은 후기 구조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논리이다.

또 그것은 오래전 불교에서 가르쳤던 불이(不二), 즉 차이가 없는 세계와도 닮은 꼴이다. 그렇다면 누적된 피로도에서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심리를 넘어 '일상의 삶이 곧 깨달음의 경지' 라는 발견으로 이어져야 한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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