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산업스파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7세기 중반 서유럽의 섬유산업은 이탈리아가 지배하고 있었다. 최고급 비단이 주력상품이었다. 기술자의 출국을 금지하고 기술을 유출하면 사형에 처하는 등 ‘기술 보안’에도 신경 썼다. 그런데 1717년 날벼락 같은 일이 터졌다. 영국 더비에서 롬브 형제가 이탈리아의 볼로냐 비단 못지않은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볼로냐 비단 길드는 큰 충격에 빠졌다. 진상조사 결과가 나왔다. 형제가 볼로냐 비단공장의 평면도를 훔쳐냈던 것이다. 격분한 길드는 암살단을 보내 동생인 존 롬브를 독살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형 토머스 롬브는 훔친 기술로 특허까지 얻었다. 기사 작위도 받았다. 그의 성공 이후 영국 내에서 최신 방적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국 산업혁명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산업화를 이룬 영국은 기술 유출에 엄격했다. 외국인은 공장을 견학할 수 없었고 기계 반출도 금지됐다. 핵심 기술자는 해외여행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물한 살의 섬유기술자 새뮤얼 슬레이터는 1789년 감옥에 갈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영국에서 공장을 차릴 만한 자본이 없었다. ‘미국은 직조기 기술자를 우대한다’는 불법 유인물이 그의 맘을 끌었다. 슬레이터는 미국에서 브라운 형제를 만났다. 브라운 대학교 설립자다. 슬레이터는 이들의 자본으로 1790년 로드아일랜드에 방적공장을 세운다. 미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슬레이터를 ‘미국 제조업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가 쌓은 부는 현재 가치로 2억5300만 달러(약 3000억원)에 이른다. (권홍우, 『부의 역사』)

미국인 캐벗 로웰은 부유층 출신으로 하버드대를 졸업했지만 슬레이터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는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최첨단이던 카트라이트 방직기 제작 기술을 훔쳐냈다. 1810년대 로웰이 훔쳐낸 기술로 미국에 방직기가 대량 보급되면서 영국의 독점 시대가 끝났다. (스티븐 핑크, 『기업스파이 전쟁』)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 기술 유출 사건으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산업스파이가 영웅 대접을 받은 것은 국익에 기여했다는 명분 덕이었다. 슬레이터는 ‘제2의 조국’인 미국에선 영웅이지만 고향인 영국에선 지금도 반역자 취급을 받는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술을 훔쳐낸 ‘산업스파이’는 미국 회사 쪽 한국 직원이라고 한다. ‘애국심으로 포장할 수조차 없는 산업스파이’. 두 글자로 줄일 수 있다. 도둑.

구희령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