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잘 사는게 미안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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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명문 가정, 부유한 환경, 11세 도미(渡美)유학. 동부 명문고를 거쳐 하버드.컬럼비아대학. 국제적인 경영인 수업. 귀국 후 세계적 회사 세 곳의 자본.경영컨설턴트, 그리고 자기 소유 회사빌딩만도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조용한 부자다. 그러나 그가 진짜 큰 부자가 된 것은 2년 전 어느 날 아침 무심코 켠 TV에서 서민의 생활상을 보면서였다.

저렇게 힘든 사람도 많은데 나 혼자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 건가. 우리만 편하게 잘 살아도 되는 건가.

아이들도 잘 자라고 사랑스런 아내,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 사업도 일익번창. 정신없이 달려 이루긴 했지만, 그날 새벽 문득 잘 사는 자기 형편이 괴롭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아내를 깨웠다. 그녀도 동감이었다. 해서 시작한 일이 불우아 돌보기였다. 정신.신체 지체아들이다.

처음엔 재정후원만 했지만 그로선 미진했다. 팔을 걷어붙이고 아기들 수발을 들었다. 밥 먹이고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고. 처음엔 '징그럽기도 했지만' 차츰 아기와 나 사이에 따뜻한 인간적 교감이 흐르기 시작한 걸 느꼈다.

아, 이 작은 행복. 이 순간만은 냉엄한 비즈니스도, 부귀영화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게 없이 그저 따뜻하고 행복하다.

한달 치고 열흘은 비행기에서 밤을 지내야 하는 살인적 스케줄에도 일요일 이 작은 행복의 순간만은 놓칠 수 없다. 이제야 그는 진짜 큰 부자가 된 것이다.

그와의 짧은 점심 시간이 나까지 행복하게 만들어 줬다. 친척 동생들이 그 회사빌딩에 세를 들었기에 예의상 대접한 점심이, 이렇게 큰 감동으로 이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많은 교훈을 얻은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보면 나도 많은 걸 타고 났고 많은 걸 갖게 됐다. 해서 부모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만은 지니고 살아왔다. 이나마의 겸손이 생긴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도 가진 것만큼 미안하고 괴로워했던가. 나는 과연 저들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갑자기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질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빈부격차가 날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어쩐 영문인지 부자를 시기.증오하는 풍토마저 생겼다.

하지만 비록 소수이지만 金씨 같은 따뜻한 마음이 있기에 그 절망적인 골이 메워지고 있는 것이다. 봉사란 라틴어로 '추한 것을 통하여' 라는 뜻이라고 한다.

예쁜 옷을 차려입고 노래하고 꽃을 가꾸고 혹은 선물을 싸느라 줄지어선 것은 봉사의 원래정신이 아니다. 그건 어쩌면 자기 현시.과시일 수도 있다. '징그럽다' 고 생각한 일을 몸소 하는 것, 그게 진정한 봉사다.

金씨가 더욱 존경스러운 건 그래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잘 산다는 게 무슨 뜻인가를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의 경우 가난의 역사가 워낙 길고 깊어서겠지, 돈 많이 벌어 소위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들 한다.

그러자니 때론 불행한 일도 많이 벌어진다. 사기.횡령, 싸우고 때론 철창신세. 잘 살아보겠다는 노력이 허망하게 끝날 수도 있다.

설령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경우에도 진짜 행복한 부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주위의 시기.질투는 약과다.

중상모략, 형제간 싸움까지. 그러니 부자가 될수록 고독해진다. 별장? 꿈에도 소원이지만 막상 가져 보라. 그날부터 골치다. 밤엔 강도가 무섭고 뒷산 공동묘지에서 귀신이 나올지도 모른다.

잘 산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고통이다. 어쩌면 고독하기 위한 경쟁일는지 모른다. 행복한 부자가 없다는 게 그냥 사치로 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누가 부자 되길 싫어하랴. 골치가 아파도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게 우리네 불행이다.

사업 수완만인가. 시운도 타고나야 한다. 다행히 金씨는 부자가 될 모든 조건을 갖춘 것 같다.

거기다 진짜 행복한 부자가 될 수 있는 따뜻한 심성까지. 이건 개인에게도, 그리고 우리 서민사회를 위해서도 축복이다.

부디 더 크게 벌기를 진심으로 빌겠소. 그래야 더 큰 빛으로 세상을 훤하게 비출 수 있을 것 아니겠오. 가진 게 있어야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게 현실사회다. 마음만 있으면 뭘 해, 괜히 속만 탄다.

金사장, 많이 버시오. 부자가 당신만 같으면 그나마 살 맛 나는 세상이 될 텐데.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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