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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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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인텔리인 막내 이모부가 월남 도와줘

넷째 이모는 신혼이었다. 남편은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젊은 '주의자'였다. 그는 학병 통지가 날아오자 일단 평양으로 왔다가 만주로 달아났다. 그리고 해방되자마자 보안 간부학교에 들어가더니 전쟁 때에는 김 수상의 부관이었다고 한다. 어느 나라인지 외국 대사로 나가기도 했다는데 분명치는 않다. 역시 나중에 경미 막내 이모를 만났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난 사촌 아우들도 보았고 이모부의 뒷소식도 들었다. 그는 말년에 사리원에서 국영농장 지배인으로 있다가 육십년대에 죽었다.

어머니가 남편과 자식들을 데리고 막내 여동생의 집으로 간 것은 집안에서는 유일하게 그녀와 의논을 했기 때문이었다. 막내 이모부는 겉으로는 모르는 척했지만 자기의 차를 운전수까지 붙여서 해주까지 태워다 주라고 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우리 가족의 월남을 도와 주었다. 어머니 말처럼 이모부는 '인텔리여서' 북에서 적응할 수 없었던 동서와 그 가족을 도와 주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차를 탔던 기억은 없고 차에서 내려 들판에서 소풍 가는 시늉을 했던 부분만 남아 있다.

그리고 다시 기억은 끊긴다. 월남해서 서울의 이 동네 저 동네로 이사 다녔던 일은 아슴푸레한 꿈처럼 어떤 장면 몇 가지만 남아 있다.

뒤뜰이 제법 넓었고 살구나무와 앵두나무가 있었다. 오랫동안 정원을 돌보지 않아서 땅에는 두텁게 쌓인 낙엽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땅에 저절로 떨어진 살구를 주워 먹었다. 아침 이슬에 흠뻑 젖은 살구의 과육은 베어 물면 그대로 입 안에서 허물어져 버렸다. 방마다 다다미가 깔려 있던 일본식 적산 가옥이었다. 그곳이 몇 달 살았던 효창동 이층집이라고 한다. 아마도 일본인이 떠나자마자 평양에서처럼 약삭빠른 이들이 헐값에 차지했을 것이다. 아래층에 주인이 살았고 우리는 이층에 살았던 것 같다. 어머니가 아래층에서 풍로에 밥을 해서 이층으로 날랐다. 누나들이 어머니를 돕는다고 그릇을 들고 오르내렸다. 방마다 있던 오시이레 문을 열면 우리가 넣어둔 침구와 임시로 싸둔 옷가지들을 넣어둔 고리짝들이 있었고 나프탈린 좀약 냄새가 났다. 이후 내 유년시절의 기억은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진해지는 내 옷자락에 배인 나프탈린 냄새로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영향 아래서 여기가 임시의 거처에 지나지 않는다는 잠재의식 속에서 성장한다.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기간 '난민'이었다. 육이오가 일어나고 전후 복구 시절이 길어지고 군사독재가 지속되는 동안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 엎드리면 코 닿을 만한 비좁은 반도의 남쪽 곳곳이 고향이면서도 농사 일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었던 이농민들, 그리고 삶의 터전으로는 이곳이 마땅치 않아 외국의 타지로 흘러갔던 이민들, 냉전이 시작되어 서로 다른 체제의 나라에 살아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만날 수도 없었던 모든 한국인이 난민이었다. 어머니는 한철 과일을 먹다가도, 아니면 무슨 야채나 밭 작물을 먹다가도, '이게 무슨 맛이 이러냐, 우리 고향 오이는 이렇지 않은데'하는 식이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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