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학자 30명 금강산 선상 토론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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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존이구동(存異求同)' . 일단 다른 점은 묻어 두고 같은 것을 취한다는 뜻이다. 목표는 분명한데 서로 의견이 엇갈릴 때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한 지혜다.

50여년간 이 땅을 두 동강으로 갈랐던 분단의 벽을 넘는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존이구동의 자세로 '하나 되기' 를 모색하는 것은 어떨까.

지난 12~15일 금강산행 봉래호 회의장.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통일뱃길' 에 30여명의 진보계열 학자들이 모였다.

역사.정치.경제(노동).사회문화와 여성 분야의 내로라 하는 이론가들이 나와 분과별로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주제는 '한반도 통일논의의 쟁점과 과제' . 한신대와 사단법인 통일맞이가 개교 60주년 및 문익환 목사 6주기를 기념하여 마련한 자리였다.

첫번째 역사 분과에서부터 날카로운 논쟁이 일었다. 민족주의 담론이 도마 위에 올랐는데, 이는 전체 논의의 중심축 구실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민족주의가 통일의 선(善)인가, 아니면 악(惡)인가 하는 문제다. 국사학자 집단과 한 서양사학자가 대표주자로 맞섰다.

먼저 한양대 임지현(서양사학) 교수가 민족담론의 '저격수' 로 나섰다. 임교수는 "민족주의가 냉전체제를 분쇄하는 데 기여한 일면이 있지만, 이 땅에서는 민중을 동원하고 억압하는 이념적 기제였다" 고 목청을 높였다.

따라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중적 해방의 기치를 높이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국사학자들에게 이같은 '탈(脫)민족론' 은 용납될 수 없는 일. 서중석(성균관대).박찬승(목포대).한병우(한신대).도진순(창원대) 교수 등은 "민족을 떠난 통일논의는 있을 수 없다" 고 반박했다.

동국대 강정구(사회학) 교수도 "분단과 통일을 규정하는 모순이 민족과 외세 사이의 것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며 임씨의 주장을 비판했다.

강교수의 이런 지적은 통일문제를 과연 남북 내부의 문제로 보느냐, 아니면 국제문제로 봐야 하느냐에 대한 중요한 의제(議題)를 도출해 내기도 했다.

통일의 속도문제를 놓고도 학자들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강교수는 "외세 개입의 변수를 고려할 때 이른 시일 내 대내외적으로 통일을 선언해야 한다" 는 '선통일론' 을 폈다.

이에 대해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상당기간의 평화공존기를 거쳐 20~30년 뒤 완전한 1국 통일(one Korea)을 이뤄야 한다는 '협상통일론' 을 제기했다. 서중석 교수도 '존이구동' 의 점진적 통일을 역설했다.

통일의 주체와 관련, 여성분야의 신선한 시각이 표출된 점은 어쩌면 이번 심포지엄의 최대 수확이다. 여성분과의 발제자인 한신대 고갑희(영문학) 교수는 "남북한 다같이 가족과 민족이데올로기가 여성억압에 동원되고 있다" 며 "이런 다양한 '성장치' 를 깨야만 통일이 여성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 고 말했다.

강만길 교수는 "그동안 무성했던 통일논의의 거품이 빠지면서 이제는 통일담론이 이성적 단계로 들어섰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고 총평했다.

금강산=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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