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칼럼] 동화 '화장' 벗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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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소설과 달리 동화는 언제나 '다시 쓰기' 의 대상이 되어 왔다.

명분은 다른 사회와 시대적 맥락 속의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언제나 다시 쓰는 자의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새롭게 발흥한 계급이나 집단들은 언제나 자기 계급과 집단의 미래인 어린이들을 식민화하기 위해 '동화 다시 쓰기' 를 실천했다.

부르주아가 그랬고, 노동 계급이 그랬고, 근래에 등장한 페미니즘 동화나 게이 동화, 그리고 생태주의 동화 또한 그런 예다.

이런 다시 쓰기는 때로는 단순한 전도나 변형에 지나지 않는 태작에 머무르기도 했고, 때로는 심층적인 변형을 경유한 성공작을 낳기도 했다.

*** 로버트 쿠버의 패러디

그런 성공작으로 샤를르 페로의 악명 높은 동화 '푸른 수염' 을 여성의 시각에서 다시 쓴 제인 켐피온의 '피아노' 를 들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런 사례에 로버트 쿠버의 '숲 속의 공주 잠 깨다' (한밭.1999년)를 추가하고 싶다.

쿠버의 소설(이 책은 도저히 동화라고 부를 수 없으며, 어린이들에게 읽히기는 대단히 부적절하다)의 원제가 '들장미' 인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그림 형제의 '들장미' (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의 원제다)를 다시 쓴 것이다.

쿠버의 소설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이 동화에 대해 이렇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백년 동안 잠을 자는 미녀는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을까□ 그 꿈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1백년 동안 모든 사람이 잠들어 버린 성이란 도대체 어떤 풍경의 것일까. "

이런 의문을 던지는 순간, 낭만적 사랑의 원형처럼 여겨지는 그림 형제의 동화는 그 기저에 어떤 기괴한 무엇을 숨기고 있음이 드러난다.

쿠버는 잠자는 미녀의 번잡한 꿈을 경유해 우리를 이 기괴한 무엇의 세계로 이끌어가거니와, 우리는 그 여행 속에서 현실과 꿈의 분기점이 어디인지를 잊게 된다.

그 기괴한 풍경과 꿈의 편린을 옮겨보면 이렇다. 미녀의 침대는 1백년에 걸친 월경이 더덕더덕 쌓여 있고, 먼지와 쥐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너무나 오래 한 자세로 누워있었기 때문에 등의 살이 문드러질 지경이다.

잠들어 있는 성을 둘러싼 빽빽한 장미 숲에는 숱한 세월 동안 그 가시덤불을 뚫고 그녀에 이르고자 했으나 실패한 숱한 왕자들의 해골들이 스산하게 걸려 있으며, 그 왕자들의 유령은 그녀의 몸을 더듬고 물어뜯는다.

어쩌다가 그녀의 성에 들어선 사람들은 왕자가 아니라 술 취한 농부들이었으며, 잠자고 있는 그녀를 범하기도 한다.

때로 미녀는 자신을 애무하는 손길을 느끼지만 그것은 성에 들어온 원숭이가 그녀의 몸에 있는 이를 잡아먹기 위해서 했던 짓일 뿐이다.

한 왕자가 해골과 장미 가시를 넘어서기 위해 온갖 고난을 무릅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나게 될 여자가 이 모든 정열에 값하는 여자인지를 의심한다.

혹 덩그렇게 남은 해골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비뚤어진 증오에 찬 사악한 요정은 아닐까. 이런 의심은 미녀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개구리의 키스에 깨어나 개구리로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지 불안해 한다.

마침내 왕자가 성에 도달하지만, 그를 앙모해온 그녀에게 막상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들장미를 헤치고 온 적이 없으며, 아무래도 성을 잘못 찾은 것 같다고.

이런 쿠버의 이야기는 일견 그저 짓궂은 상상력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실험적인 기법의 텍스트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들을 낭만적 사랑이라는 물레의 북바늘에 찔리게 해왔던 동화를 철저히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낭만적 사랑에 내장된 환상의 구조를 폭로하고 있다.

그는 소설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법의 잠으로부터 끊임없이 깨어나는 것이 존재의 이유랄 수 있는 공주는, 요정의 주문에 묶인 존재로서 아직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라기보다는 결코 이뤄지지 못할 상황을 재연하려 끊임없이 애쓰고 있는 것이다."

*** 환상.낭만의 허구 폭로

항용 우리는 잠자는 미녀가 주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린다고 생각하지만 쿠퍼는 그 미녀를 주술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바로 그 상황 자체(왕자의 입맞춤)가 바로 주술적 상황에 불과하며, 그것이야말로 가능하지 않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셈이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미녀는 불운하게도 물레의 북바늘에 찔려 잠이 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레 북바늘을 반복해 찌르는 존재며, 스스로 잠들고자 하는 잘못된 욕망에 차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잠자는 미녀에게 필요한 것은 키스가 아니라 물레에 찔리려 하는 잘못된 충동을 제거하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은 현실과 대면해야 하는 그녀, 그리고 그녀와 다르지 않은 우리의 공통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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