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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인을 사랑에 빠뜨린 박열의 무정부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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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와 박열(朴烈·1902~1974) 두 사람의 기개를 존중한 다케마쓰 검사와 예심판사가 투옥 중인 두 사람을 동석시켜 찍은 사진. 다정한 포즈를 취한 두 사람의 사진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자, 대역 죄인을 우대했다는 빌미로 정쟁이 벌어져 내각이 붕괴되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은 가네코 후미코는 숙명적 사랑에 빠졌다.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미친 바람이 몰아치던 와중에 두 사람은 천황을 폭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법정에 섰다. “멸하라! 모든 것을 멸하라! 불을 붙여라! 폭탄을 날려라! 독을 퍼트려라! 기요틴을 설치하라! 정부에, 의회에, 감옥에, 공장에, 인간시장에, 사원에, 교회에, 학교에, 마을에, 거리에.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럽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1924년 옥중에서 박열이 쓴 ‘나의 선언’이 잘 말해주듯, 두 사람을 맺어준 연결고리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힘―국가·법·감옥·사제(司祭)·재산 등―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아나키즘이었다.

“일본 민중에 대해서는 일본 황실이 일본 민중의 고혈을 착취하는 권력자의 간판이며 신과 같은 자가 아니라 유령과 같은 자에 지나지 않음을, 조선 민중에 대해서는 실권자로 생각하며 증오의 과녁으로 삼고 있는 일본 황실을 쓰러뜨려 조선 민중에게 혁명적·독립적 열정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나는 처음에 민족적 독립사상을 가지고 있던 차에 광의의 사회주의에 빠져들었고, 그 후 무정부주의로 변한 후 다시 현재의 허무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지만, 지금도 민족독립사상을 내 마음 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러나 후미코와 달리 차별 받는 식민지 사람이었던 박열의 법정 진술이 잘 말해주듯이, 그의 뇌리 깊숙이 각인된 민족의식은 어떠한 지우개로도 지울 수 없었다.

낱낱의 개인을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전체에 종속시킨 군국주의의 광기 속에서도 개인의 양심을 굽히지 않은 일본인은 후미코만이 아니었다. “박열 부부의 죄로 말하면 일본인으로는 말로 할 수 없는 큰 죄이지만, 경우를 바꿔 생각하면 박열만 나쁘다 할 수 없다.” 이 발언으로 직을 내놓은 마키노(牧野) 재판장. 이들의 변호를 맡았던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모래사장에서 찾은 바늘과 같기에 이들에 대한 기억은 한·일 두 나라 시민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밝힐 희망의 등불로 더욱 빛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