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주제로 한 산문집 '시간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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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 신간을 어떤 장르로 자리매김해야 할까. '시간의 지도리(문짝을 여닫게 하는 경첩)에 서서' 는 철학을 주제로 한 산문집. 따라서 통념상 '철학 에세이' 라는 문패가 걸맞다.

각주(脚註)를 갖춘 논문과 달리 지식대중 일반을 겨냥한 편안한 글 말이다. 하지만 혼동을 하지는 말자.

'길을 묻는 그대에게' 와 같은 안병욱.김형석 교수가 써온 전시대의 감상적 산문들과 이 신간은 선명하게 구분된다.

바로 그런 차별성 때문에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에 책 한권에 대한 리뷰 이상의 무게를 싣는다. 이 시대 대중에게 말 건네기를 시도하는 방식의 새로운 철학 언설(言說)인데다가, 자기 사유가 녹아들어 육화(肉化)된 언어까지 담겨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 성과란 서양철학 유입 이후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다.

◇ 감상적 철학에세이와 다른 점〓쉽게 말하자. '시간' 이 갖는 차별성은 1970년대 전성기 시절의 철학 에세이들과 비교할 때 드러난다. 왕년의 철학 에세이란 실은 철학행위와 무관한 종류의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주제로 한 감상과 푸념' 에 불과했다.

강의실에서는 서구철학에 관한 풍문을 전도(傳道)하지만, 막상 대중적 글쓰기를 할 때는 이상하게도 문학소녀 취향으로 흐르는 이중적 성격이 특징이었다.

바로 이 점이 한국철학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즉 '바다 건너의 풍문' 이 정작 현실과 대중을 위한 버팀목이 못된다는 점을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고, 따라서 대중에게 들려줄 메시지는 사실상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신간의 저자 이정우(41.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세대적 성격부터 감지해야 옳다. 그는 근대 서양철학 유입 이후 자기 목소리를 가진 제3세대 학자 중 '간판' 으로 꼽을 만하다.

◇ 아카데미즘의 직무유기〓앞뒤 설명은 그렇다 치고, 신간에 담긴 메시지는 에세이 형식과 달리 매우 묵직하다. 책이 던지는 질문의 핵심은 이렇다.

"대학 내 철학과는 줄줄이 폐과(廢科)직전인데, 사회 전반에 걸쳐 철학적 사유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기묘한 풍경의 구조적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의 문제제기도 진지하지만, 처방 역시 기술적 땜질이 아니다.

외려 근현대 학문의 탈(脫)역사성, 몰(沒)현실성 등 근원적 한계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고, 불임증(不姙症)에 빠진 대학 아카데미즘에 대한 최강도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책 곳곳에서 보이는 저자 나름의 진맥(診脈)은 오늘을 사는 지식대중들의 뒷덜미 뻐근한 피로감의 구조적 원인을 짚는 넓은 시야와 성찰을 보여준다.

우선은 대학가 아카데미즘의 직무유기가 문제다.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서양철학, 그중에서도 독일 관념론에 대한 훈고학(訓學), 즉 자구풀이에 매달렸다.

60년대 분석철학의 도입은 '일제의 흔적 위에 USA 담론이 덧칠된 것' 일 뿐이었다.

문제는 정작 의미있는 사유의 전투를 벌인 것은 강단 밖의 '재야' 였고, 그것은 80년대 좌파들의 변증법, 90년대 탈(脫)근대 사유의 도입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 이 시대 철학의 새로운 길〓저자는 강단철학이 '현실과 담쌓은 소종교 집단의 죽은 담론' 으로 굳어졌음을 지적하면서 프랑스의 사례를 든다.

"프랑스 철학은 늘 제도권의 훈고학적 강단철학과 미셸 푸코 같은 강단 바깥의 살아있는 철학이 주고받는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프랑스 철학의 빼어난 전통이다."

저자의 구상이 짐작되는 다음의 목소리는 아마도 이 책의 핵심 메시지일 것이고, 이 시대 인문학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일 것이다.

"지난 10년간 살아있는 사유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젊은 세대가 형성됐다. 또 일정한 제도적 신작로만을 따라가야 했던 시대는 지나가고, 얼마든지 '새로운 오솔길' 을 낼 수 있는 삶의 양식이 도래했다. 인터넷.소규모 연구소.잡지.사내 대학.시민연대 등 수많은 담론과 실천의 양태들이 도래한 지금 창조적 사유를 위한 토대가 마련돼 있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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