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10·4 노인 애국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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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0월 4일 시청 앞 집회는 독특했다. 기자로서 현장을 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광장으로 들어섰을 때 먼저 떠오른 것은 "세계 역사상 이런 집회가 있었을까"라는 경이감이었다. 참석자는 거의 장.노년층이었다. 군복 차림도 많았다. 마이크에서는 기도가 한창이었다. 노인, 군 출신, 기독교인…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집합이었다. 노인들의 집회라면 "연금을 올려달라"거나"건강보험에 노인병을 추가하라"는 등의 구호가 나왔을 법하다. 크리스천들의 시위라면 "낙태수술을 반대한다"거나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할 수 있게 하라"는 요구가 있었을 법하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노인 시위

그러나 이런 유의 구호는 한마디도 없었다. "나라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나라를 구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아니면 "보안법을 폐지하면 안보가 위태롭다" "사립학교법 개정은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었다. 세계 역사에서 노인들이 십만명 단위로 모여 이렇게 나라를 걱정한 예가 있었을까. 이들은 '수구보수 꼴통' '기득권층'이 아니었다. 보통의 노인들이며 애국자들이었다. 나는 분노가 솟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평생 열심히 일만 하다가 이제는 은퇴하여 여생을 안락하게 보내야 할 권리가 있는 분들이 왜 나섰는가.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는가. 노인대접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지켜달라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들이 평생을 바쳐 세워 놓은 경제를 허물지 말라는 간청이었다.

그러나 이 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비아냥거리고 있다. "조금 지나면 떠나갈 세대" "흘러간 물"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글퍼지는 것이다. 노인들의 눈빛은 단호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결의도 보였다. "투표장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쉬어라"는 수모까지 당했던 뒷방 늙은이들은 이미 아니었다.

나는 이 나라가 평화로운 나라, 서로 도와 가며 사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뒤 세대가 앞 세대를 뒤집어 엎는 나라가 아니라 전통이 계승되는 나라, 축적이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은퇴한 세대는 흐뭇하게 젊은 새 세대를 바라보며, 젊은 세대는 선배 세대를 존경하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 나라는 이미 갈라져버렸다. 누군가가 이 병을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식의 잘못을 부모가 용서할 수밖에 없듯이 선배 세대가 새 세대를 품에 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집단시위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젊은 세대가 촛불시위를 한다고 노인들도 똑같이 집단시위를 벌인다면 우리 모습만 부끄러워지지 않을까.

원로는 원로다운 방식이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젊은이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30대는 이미 늦었다면 20대를, 아니 초.중.고생 손자라도 가르쳐야 한다. 어쩌면 늙은 세대는 씨만 뿌리고 열매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늦지 않다. 가르치되 몰라서 저지른 잘못, 잘못된 현실 때문에 비뚤어진 마음은 포용해야 한다. 넉넉한 품이 있다는 것이 바로 나이 든 사람들만의 장점 아닌가. 그러자면 노인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 때는 이랬는데…"라고 옛날만 고집해선 안 된다.

젊은이들이 옳고 그름의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현실과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누구라도 나서서 미래의 꿈과 비전을 알려 주어야 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젊은이들이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빠져 있으면 개방적 세계주의를 알려줘야 한다. 이념 대신 실용을 가르쳐야 한다. 젊은이들이 미움과 적개심과 편 가르기에 빠져 있으면 노인들은 관용을 가르쳐야 한다. 사회는 계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목소리가 힘을 가지려면 정파적이어서는 안 된다.

***젊은이에 분별력.관용 가르쳐야

지금 나이에 국회의원을 하겠는가, 출세를 하겠는가. 좌우.진보.보수를 초월해 참 애국심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런 진심이 있다면 젊은이들도 감동할 것이고 감동이 있으면 마음을 열 것이다. 강연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강연으로, 글을 쓸 사람은 글로써, 뒤에서 물질로 도울 사람은 물질로써 지원하면 된다. 말로만, 빈손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10월 4일이 이 나라 현대사에 획을 긋는 날이 될 것을 소망한다. 우리 자손들이 역사책에서 21세기 초 분열과 갈등의 위기 속에 빠진 한국을 노인들이 젊은이 같은 용기와 원로의 지혜로써 구한 사건이 '10.4 노인 애국운동'이라고 배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문창극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