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면책특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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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구두(口頭)에 의한 명예훼손을 영어로는 '슬랜더' 라고 한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라이블' 이라는 표현을 따로 쓴다.

"우리 사장은 부당하다" 고 친구들에게 말했다면 사장에 대한 슬랜더가 될 수 있다. 특정 정치인을 '부패한 정치인' 으로 비방한 글을 신문사에 보냈다면 설사 그 글이 신문에 실리지 않았더라도 당사자에 대한 라이블로 고소될 수 있다.

호주의 저명한 법학자인 브라이언 마틴은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서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결론이 아닌 사실을 말하라' 고 충고한다.

예컨대 "정치인 ×는 부패했다" 고 말하지 말고 "정치인 ×는 부패행위와 관련한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는 식으로 말하라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만 앞세우다가는 큰코 다치기 십상이란 얘기다.

하지만 직업상 정보를 제공할 의무를 지닌 사람에 의해 행해진 명예훼손은 면책사유가 될 수 있다는 법해석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국회의원에 대한 면책특권이다.

의회 내 토론과 발언의 자유가 보장될 때 의회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영국인들의 신념은 세계 최초로 면책특권을 도입하는 배경이 됐다.

1689년 채택된 '권리장전' 제9조는 "의회에서의 발언과 토론은 법정이나 의회 밖에서 소추나 심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고 못박고 있다.

미국 헌법 제1조 6항에서 면책특권은 국회의원의 직업적 특권으로 인정됐고, 우리나라 헌법 제45조는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대해 국회 밖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고 규정하고 있다.

국정감사 과정에서 질문형식을 빌려 비리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여권실세 KKKP 4인의 실명을 거론한 한나라당 이주영(李柱榮)의원에 대한 제명결의안이 어제 여권에 의해 국회에 제출됐다.

여권은 공연히 허위사실을 적시함으로써 당사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펄펄 뛰는 반면 야당은 국회의원의 직무상 발언이라고 맞서고 있다.

1986년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다" 고 발언했던 유성환(兪成煥)전 의원의 경우에서 보듯 법원은 국회의원의 발언에 대해 폭넓게 면책특권을 인정하고 있다.

자유로운 토론과 발언을 통해 권력분립에 입각한 국회의 독립과 자율을 보장하는 것이 명예보호에 관한 개인의 권리에 우선한다는 취지다.

"명예훼손에 대한 가장 큰 징벌은 법에 의한 처벌이 아니라 당사자의 신뢰상실" 이라는 마틴 박사의 말을 믿는다면 실명이 거론됐다고 그렇게 흥분할 이유가 있을까.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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