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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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20. 고대 의대로 전근

파나마와 미국 등 해외 연구소를 방문해 출혈열 관련 첨단지식을 습득하고 돌아온 나는 유행성 출혈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입했다.

그러나 예상했던대로 출혈열 연구는 쉽지 않았다. 처음 연구를 시작한 1970년부터 세계최초로 바이러스 발견에 성공한 1975년까지 6년이란 적지 않은 세월동안 수백개의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해야했다.

오죽하면 미국의 일류 바이러스학자들도 한국전쟁 이후 유행성 출혈열 연구에 매달렸지만 모조리 실패했을까 싶었다.

그러나 고난의 연속이었던 나의 출혈열 연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의 꾸준한 연구비 지원에 힘입은 바 컸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알기 쉽다. 당시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국의 이름 모를 학자에게 세계 최강의 국가인 미국이 수만달러의 돈을 연구비로 지원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왜 하필 미군의 연구비를 이용했는지 의아해하리라 생각된다. 병원이나 연구소도 아닌 군이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나서는 사실이 얼핏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의 출혈열 연구비 지원은 철저히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보면 된다. 내가 예뻐서가 아니라, 나에게 돈을 몰아주는 것이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인 것이다.

당시 미군은 우리나라에 8만명에 이르는 군인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해마다 수백명의 출혈열 감염자가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미군이 병사들의 사기진작에 기울이는 노력은 대단하다. 얼마전 유고 내전때 추락한 조종사 한명을 구하기 위해 항공모함과 인공위성이 동원되는 구출작전을 벌이는데 수억달러의 비용을 치르지 않았던가.

출혈열 연구에 한창이던 1973년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나의 모교였던 서울의대를 떠나 고려대의대로 간 것이다.

1971년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우석대가 고려대에 흡수되면서 그 자리에 지금의 고대의대가 탄생하게 된다. 당시 고대총장이었던 김상협씨가 나에게 고대로 와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처음엔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나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그 제안은 4가지였다. 첫째 부교수였던 나에게 주임교수 자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임교수는 교수와 전공의 및 연구원 등 인력의 선발과 예산지출 등 교실운영을 책임지는 막강한 자리가 아닌가.

둘째 당시 국내엔 전무했던 바이러스연구소를 신설해주겠다고 했다. 학자에게 자신의 연구소가 생긴다는 것은 꿈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세째 월급도 25만원으로 올려준다고 보장했다. 당시 서울의대 부교수의 한달 급여가 8만원이었으므로 한꺼번에 무려 3배나 올라가는 것이다.

네째 서울대병원 정신과 수간호사 출신인 집사람을 고려대 간호대교수로 임명해 주겠다고 했다. 네번째 제안은 실효를 보지 못했다. 집사람이 몸이 안좋아 도저히 학교에서 연구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3가지 조건만 해도 파격적인 대우였다. 나는 결국 모교를 떠나기로 했다. 그때부터 1994년 고대의대 학장을 끝낼 때까지 20여년간 고대에 몸담게 된다. 지금와서 그때의 결정이 잘 한 것인지 판단하긴 쉽지 않다.

한가지 서운한 것이 있다면 내가 학장 시절 학계에 불기 시작한 정치바람이다. 학장과 총장을 직선제로 뽑게 되면서 표를 얻기 위해 젊은 교수들에게 머리를 수그려야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동창회의 압력으로 신규채용 교수는 모조리 본교 출신만으로 채워야한다는 웃지못할 압력이 내게 가해졌다.

이호왕<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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