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1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17. 뇌염연구 중도하차

일본에서 개발된 뇌염백신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해마다 수천명씩 발생하던 뇌염환자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자연히 내 연구도 힘이 빠졌고 연구비를 지원하던 미국립보건원도 추가연구를 중단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다고 할까. 돈벌이 등 실용적 관점에서 벗어나 순전히 지적 호기심에서 연구할 수 있었던 낭만적 분위기는 당시에도 이미 기대하기 어려웠다. 현재 뇌염은 수 년에 한 두 명 발생할 정도로 잊혀진 질환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할 일은 뇌염이 뿌리뽑힌 이유는 뇌염백신이 보급된 탓도 있지만 농사법의 개량도 한 몫 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뇌염모기가 웅덩이에서 알을 까서 발생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뇌염모기는 대부분 논물에서 알을 깐다.

보기와 달리 뇌염모기는 웅덩이 등 더러운 물에선 알을 까지 못하는 까다로운 곤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약이 보급되면서 논물의 서식환경이 악화되고 벼가 익는 8월부터 논물을 빼는 새로운 농경법이 60년대 후반부터 확산되면서 뇌염모기 자체가 많이 줄었다. 자연히 뇌염 환자 숫자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나의 첫 연구사업인 일본뇌염은 이렇게 중도하차했지만 학자로서 토양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세계 유수 뇌염연구기관을 방문한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미국을 위대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립보건원이 내게 지원한 연구비엔 해외시찰 비용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선 학자로서 견문을 넓히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파격적으로 대우한 것이었다.

67년 나는 한 달에 걸쳐 일본.미국.영국.프랑스.대만의 뇌염연구기관을 순방하는 해외여행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해외시찰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내가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이다. 가장 먼저 들른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뇌염연구소만 하더라도 1년 예산이 70만달러로 이는 당시 서울의대 1년 예산의 3배가 넘는 돈이었다.

한 번은 미국 유타대 미생물학교실 게브하르트교수의 집을 방문했는데 교수가 대화 도중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환성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알고 봤더니 자신이 쓴 논문이 저명한 의학잡지 NEJM에 게재됐는데 이를 보고 한 독지가가 10만달러란 연구비를 쾌척했다는 것이었다.

연구비를 국가가 아닌 민간인이 지원한다는 사실 자체가 생소했던 내겐 부럽기만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러한 분위기가 미국에서 정착된 것도 따지고보면 연구자들이 그만큼 사회에 헌신하고 기여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워싱턴의 월터리드 미육군병원을 들렀을 때 느꼈던 일이다.

왜 이름이 월터리드인가 했더니 안내자 왈 월터리드는 19세기말 파나마 운하를 완공시킨 미육군공병대 소속의 군의관이란 것이 아닌가.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운하는 원래 수에즈운하를 완성한 프랑스의 저명한 토목공학자 레셉스가 시작했다가 실패했는데 결정적 이유가 열대지역의 대표적 풍토병인 황열 때문이었다. 인부들이 모조리 황열에 걸려 사망했던 것이었다.

프랑스가 실패한 파나마 운하공사를 미육군공병대가 성공시킨 것은 월터리드 대위가 황열이 모기로 인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규명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인부들을 모기에 물리지 않게 함으로써 무사히 파나마운하란 대역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월터리드 자신은 연구 도중 황열에 걸려 사망했다. 세계최고의 군병원으로 손꼽히는 월터리드 미육군병원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