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교등급제] 실태조사 발표 배경과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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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언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가 8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3개 대학이 올 수시 모집에서 고교등급제를 적용했다"고 발표하고 있다(左). 비슷한 시간 고려대에선 염재호 기획예산처장이 교육부의 발표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그동안 말만 무성했던 '고교 등급제'의 실체가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났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대입 수시모집에서 일부 대학이 고교 간 학력차를 일부 반영한 사실을 들춰낸 것이다.

이에 따라 대입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안 마련이 시급해졌다. 교육부가 2002학년도 대입 전형부터 고수해 온 대입제도 근간의 하나인 '고교 등급제 적용 금지 원칙'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는 현행 대입제도가 이런저런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선 공정해야 할 대입 전형이 출신 고교의 진학 실적이나 수능 성적 수준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음으로써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침해되는 일을 어떻게 막느냐가 관건이다. 동시에 학생 선발 때 대학의 자율성을 어디까지 보장해 줄지도 풀어야 할 과제다.

이에 따라 교육부가 지난달 시안을 발표한 2008학년도 이후 대입제도 개선방안에 대한 공방도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고심한 교육부=교육부는 이번 조사 및 발표 과정에서 '대학의 자율성'과 '교육의 기회 균등'간 조화와 균형 문제를 놓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대학의 학생 선발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학생들이 입시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했다는 의미다.

교육부는 당초 일부 학부모와 학원이 끊임없이 제기해 온 고교 등급제의 실체를 부인했다. 명백한 증거가 없는 데다 자칫하면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면서 거론된 대학의 조사.감사도 꺼려왔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커지자 실태조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일부 대학에서 등급제를 시행한 증거가 발견되자 비난을 감수하고 실태를 그대로 공개했다. 실태를 덮기보다 선의의 피해를 보는 학생이 없도록 제도 개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에서다. 안병영 교육부총리도 "막상 대학에 들어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문제점들이 보였다"며 "모른 척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보수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시장과 경쟁을 앞세워 대학의 자율성만 고집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진보주의자들처럼 평등에 집착해 기회 균등만 강조해서도 곤란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은 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솔로몬의 지혜'를 찾는 일이 시급한 과제다. 특히 교육 전문가들은 이번 조사 결과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극도로 분열돼 큰 혼란을 초래하기보다 대안을 찾고 화합을 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념과 교조보다는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어떤 대책 나오나=정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현행 교육부 고시로 돼 있는 고교 등급제 금지 규정을 고등교육법 시행령에 명문화해 실효를 높이기로 했다. 어떤 형태로든 고교 간 학력차가 반영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전형 기준과 절차를 전형 요강과 홈페이지에 명시하도록 권고해 신입생 선발 절차의 투명성을 유도할 계획이다.

그러나 많은 대학 관계자의 생각은 다르다. 최재훈 한양대 입학실장은 "엄연히 고교 간 학력차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고교 등급제를 금지하는 법제화를 하면 대학 입장에선 뭘 보고 학생을 뽑을지 고민"이라며 "논술이나 면접이 필답고사 수준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큰데 이를 어느 선까지 허용할지 교육부의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김완진 입학관리본부장도 최근 "3분의 1 정도의 학생은 본고사 형태의 시험도 과감하게 허용해 선발하도록 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제안한다"고 밝혔다.

◆파장 커지나=대학 전체 모집 인원의 절반 가까이 뽑고 있을 정도로 정착 단계에 있는 수시모집이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대학들이 서류 평가나 부실한 학생부가 아닌 논술.심층면접 등 객관적으로 정량화가 가능한 정시모집 비중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남중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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