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북한 변화의 '물증' 보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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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다. 미국은 회담에 앞서 50여명의 선발대를 현지에 파견해 사전 조사와 협상을 진행했으며 현재 웬디 셔먼.스탠리 로스.찰스 카트먼 등 대북(對北) 총책들을 포함한 70여명의 미국 관리들이 북한에 머물고 있다.

남북한 전문가로 구성된 미니 국무부가 평양에서 가동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사상 최초로 현역 국무장관을 파견하면서 어떠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번 회담으로 북.미관계는 급진전할 것인가.

이번 회담이 성사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북한은 테러리스트 지원국 해제를 통해 얻게 될 각종 경제적 혜택을 탐냈고, 미국은 8년 임기 동안 내치에는 성공했지만 외교문제에선 뚜렷한 업적을 쌓지 못한 클린턴의 정치적 야심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과거 미국은 북한을 상대할 때 미사일.핵.미군 유해 송환과 같이 미국 주도로 의제를 정하고 토의를 주도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1993년 이후 수많은 대북협상을 진행했지만, 북.미 제네바협약 이외에는 가시적 성과가 없었다.

이번에는 북한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카드를 준비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일단 공을 북한에 던져주고, 북한이 무엇을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를 지켜본 다음 미국의 대응방식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번 협상팀은 '말' 보다 '증거' 를 우선할 것으로 보여진다. 과거 합의와 실행이 별개로 진행됐던 사례가 있었으므로, 약속 이행이 증거로 나타나기 전에는 협정 체결은 곤란하다는 방침이다.

미 국무부가 클린턴 방북은 북.미 양국의 주요 현안에 대한 중대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북한측이 합의사항을 이행하고 미국이 그 결과를 검증하기까지는 사안에 따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클린턴 임기가 불과 석달 남짓 남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클린턴은 평양에서 멋있게 사진 촬영만 하고, 대북 협상의 실질적 이행과 검증은 차기 대통령의 몫이 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 북.미 공동성명과 클린턴 방북에 대한 미국 내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인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 행정부가 한국 정부처럼 군사활동과 테러행위에 대한 확실한 보장 없이 성급하게 움직일 경우 국내에서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 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외교정책 구조를 보면 대통령과 의회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미국 대통령은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경우 반드시 의회의 인준을 거쳐야 한다. 의회는 전쟁 선포, 예산 확정, 외국과의 통상 규제, 대통령 탄핵권을 쥐고 있어서 의회의 동의 없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제는 예산권을 쥐고 있는 의회가 아직 북한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칫 대통령이 지나치게 앞서간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대북 경수로 지원 예산에서 무려 2천만달러를 삭감했던 것처럼 '대통령의 약속이행에 '실질적 타격을 안겨줄 수 있다.

클린턴 방북을 전후해 핵.미사일, 테러리스트, 적군파 문제 등에서 만족할 만한 진전이 이뤄진다면 미 행정부는 의회를 설득할 수 있는 확고한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이 말만 앞세우고 실천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에는 대선 이후의 클린턴 대통령 북한 방문은 의례적인 일회성 공식방문으로 그칠 것이다.

지금 미국 외교정책의 쌍두마차인 백악관과 의회, 민주당과 공화당은 선거시즌을 맞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대통령과 의회를 모두 민주당이 장악하거나 대통령과 의회 어느 한쪽만 민주당이 장악하더라도 여력이 있지만, 의회와 백악관을 모두 공화당이 주도하게 된다면 클린턴의 행동 반경은 상당히 좁아질 것이다. 동시에 미국의 외교정책의 방향도 다소 조정될 수 있다.

북한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 이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미국의 클린턴이 줄줄이 북한을 찾아와 김정일(金正日) 위원장을 만나는 것에 우쭐할 때가 아니다.

북한이 백악관과 미 의회를 모두 설득해 실익을 얻기 위해서는 클린턴 방북에 앞서 화려한 '합의' 가 아닌 실질적인 '증거' 를 준비해야 한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기회도 위기가 될 수 있다. 국제사회는 북한 변화의 실천을 기다리고 있다.

김정원 <세종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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