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송순태 '지우개'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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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잘못 써내려온 문장이 있듯이

잘못 살아온 세월도 있다

바닷가에 앉아서 수평을 보고 있으면

땅에서 잘못 살아온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오는 이유를 알겠다

굳은 것이라고 다 불변의 것이 아니고

출렁인다고 해서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굳은 땅에서 패이고 갈라진 것들이

슬픔으로 허물어진 상처들이 바다에 이르면

철썩철썩 제 몸을 때리며 부서지는 파도에 실려

매듭이란 매듭은 다 풀어지고

멀리 수평선 끝에서 평안해지고 마는구나

잘못 쓴 문장이 있듯이

다시 출발하고 싶은 세월도 있다

- 송순태(59) '지우개' 중

연필심에 침을 바르며 숙제 하다가 공책이 찢어지도록 지우개로 문지르던 어린 날이 있었다.

잘못 쓴 글씨들은 지워서 없어지겠지만 잘못 살아온 날들은 무엇으로 지운다? 바다는 파도를 일으켜 제몸을 맺혔다가는 푸는 것이겠네만, 그래서 수평선을 보며 살아온 날들의 주름살을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이겠네만, 연필 글씨를 지우듯 지울 수 있는 삶의 지우개를 파는 가게가 없어 그저 바다 앞에 서 보는 것이라면 모르겠네만.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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