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인위적 화합만으론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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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화합의 정치' '상생의 정치' '원만한 여야 관계 정착' 등 각종 수사(修辭)가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수사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나라답게' 현실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가 또 다시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된다. 화려한 수사로 포장된 정치개혁 운동이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상 그리고 방법상의 문제로 인해 오히려 민주주의를 저해했던 예가 과거에 수많이 있었다. 노벨상 이후 국정방향에 대한 최근 정치권에서의 논의가 이러한 우려를 자아낸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인위적인 방식으로 화합을 추구하려 하는 것 같다. 진정한 정치적 화합이나 상생은 몇몇 주요 인물간의 '고차원적' 결정이나 상징적 인적 교류로는 충분히 도모되지 않는다.

그보다 제도 차원에서 다양한 권력주체간에 균형과 조화가 형성돼야만 견고하고 지속적인 화합이 가능할 수 있다. 특히 국회가 입법부로서의 제도적 권한을 강력히 수행하며 행정부와 권력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균형 잡힌 제도의 틀 속에서 대화가 시도돼야 하는 것이다.

*** 보스 권력강화 기여할 뿐

소수의 인물을 중심으로 인위적 화합을 추구하면 그 상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효과성은 크거나 넓거나 오래 갈 수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극소수 보스의 개인적 권력기반만 강화시키고 민주주의의 제도적 토대는 오히려 부식된다는 점이다. 한국정치가 몇몇 정치인 개인들에 의해 좌우돼 왔고 제도화가 요원하다는 점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혹자는 인물 본위의 접근은 제도적 균형을 위한 예비 단계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자에 우선순위를 둘 경우, 후자가 더 손상될 수 있다는 역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요즘 거론되고 있는 여야 영수회담의 정례화를 생각해 보자. 언뜻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인위적 화합에 따르는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양자간 담판을 통해 국정을 이끈다면 정당이라는 제도, 국회라는 제도, 그리고 국회와 행정부간 공동결정을 위한 제도적 경로가 공히 위축된다.

두 사람의 개인적 권력기반이 탄탄해지는 반면에 제도의 중요성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수회담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가려서 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를 제도의 균형되고 원활한 작동에 둬야지, 영수회담의 정례화에 두어서는 곤란하다. 제도가 잘 돌아가 영수끼리 만날 필요도 없도록 목표를 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 制度가 원활히 작동해야

金대통령의 당적 이탈 요구도 제도 차원에서의 공존과 균형보다 인물 본위의 인위적 화합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당적을 이탈한 후 과연 사심(私心)없이 공동선을 추구할지, 혹은 정당의 뒷받침 없이 권력누수로 힘을 잃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대통령이 제도로 존재하기보다 여러 제도들과 무관한 (혹은 그 위의)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 개인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대통령은 삼권분립의 헌법체제 아래 행정부의 수장(首長)으로서 제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대통령은 전제적 군주도, 상징성만 지닌 형식적 수반도 아니므로 그 존재가 개인 차원에서 규정돼선 안된다.

마찬가지로 거국내각 구성, 영남 인사 중용 등의 요구도 언뜻 멋지게 들리지만 인위적 노력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야당 의원 및 영남 인사 몇명이 행정부 고위직에 임명된다고 해서 국정이 정파성을 떨쳐버릴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소수 개인들에게 정치적 화합의 책무가 지워짐으로써 제도 차원에서의 균형과 조화 노력이 희석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물론 제도는 사람들로 구성되므로, 제도차원의 대화와 인물 중심의 화합이 상호 부합하는 바 크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아직 제도화가 미흡한 상황에서 지나친 인물 중심의 국정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위태롭게 한다.

이제는 우리의 초점을 제도의 활성화, 특히 국회의 활성화에 맞출 때다. 국회 심의의 충실화를 기하고 국회의 대행정부 견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올 2월에 개정된 국회법을 어떻게 잘 실행할지 고민할 때다.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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