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뭉칫돈 해외로 새나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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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6일 오후 서울 종로. 허름한 4층 건물 구석방 A환전소. 손님으로 가장한 기자가 미국으로 10만달러 송금을 요청했다. 환전소의 40대 남자는 서랍에서 꺼낸 장부를 뒤적이다가 어딘가로 전화했다.

그러고는 "마침 적당히 송금할 수 있는 선(線)이 있다. 돈만 가져오라" 며 미국 주소와 전화번호가 빼곡이 적힌 장부를 슬쩍 보여줬다.

요구한 수수료는 1천달러. 이주비 한도가 남은 교포의 이름을 빌리거나 무역을 가장해 송금하는 불법송금 현장.

증시 침체.유가 급등으로 경제상황이 불투명해지는 데다 금융소득종합과세와 예금부분보장제도.돈세탁방지법 등 돈 굴리기를 제약하는 각종 조치들이 내년 1월로 닥쳐오자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개인 송금한도를 완전히 푸는 2단계 외환자유화가 내년 1월 시행되면 더 많은 돈이 새나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별도의 증명서류 없이 해외로 돈을 보내는 증여성 해외송금은 통계에 잡힌 금액만 해도 올 들어 7월까지 21억8천만달러(한국은행 집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3%나 늘었다. 금융감독원 박동순 외환감독과장은 "최근의 증여성 송금 급증은 이상징후" 라고 말했다.

통계에 안 잡히는 것은 더 많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허술한 감시망을 틈탄 불법 외환 유출입 규모를 올해 무려 25조~50조원으로 추산 한다.

실제로 ▶차명(借名) 분산 송금▶해외교포 한도 전용(轉用)▶무역.해외투자 가장▶들어오고 나가는 돈을 맞바꾸는 환치기 등 불법 자금유출이 판치고 있다.

일부 은행에선 관행화된 차명 송금을 눈감아주는가 하면, 일부 악덕 환전소와 이주대행업체가 불법 송금을 알선해 주면서 송금액의 1~2%를 수수료로 챙기는 것으로 확인됐다.

B환전소 李모 사장은 "10만~20만달러 정도는 하루 이틀이면 보낼 수 있다" 며 "최근 국내 정치.경제상황에 불안과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의 해외송금 문의가 크게 늘었다" 고 말했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중심가의 H은행 이주센터 외환창구. 여섯대의 전화가 쉴새없이 울렸다. "환율과 주가가 불안하니 맡겨둔 예금을 빨리 송금해달라" 는 캐나다와 미국 교포들의 전화 때문이었다.

이 은행 관계자는 "하루 20만~30만달러 송금이 정상이지만 이날은 1백50만달러나 빠져나갔다" 며 "교포들이 국내 경제동향에 민감해지고 있다" 고 말했다.

내년 1월 이후 돈을 내가기 위한 조짐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 시중은행 해외이주센터 관계자는 "내년 초에 10억원 이상의 국내 재산을 반출하겠다는 사람들의 상담이 하루에 두세건씩 이어지고 있다" 고 말했다.

기획취재팀=고현곤.이상렬.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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