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연방대법원 첫 공개 비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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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보안경을 쓴 채 오하이오주 엘리리아에 있는 한 금속 부품 생산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엘리리아 AP=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라디오·인터넷 주례연설에서 연방대법원을 맹비난했다. 대법원 판결을 놓고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일”이라고 공격했다. 미 대법원은 21일 기업이 특정 후보를 편들기 위해 선거 광고에 돈을 쓰지 못하도록 한 법조항을 헌법상 ‘언론자유’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오바마는 이번 판결에 대해 “특수 이익집단의 돈이 정치권에 쏟아져 들어오는 계기를 만든 것”이라며 “대형 석유회사, 월가 은행들, 건강보험회사에 승리를 안겨준 셈”이라고 퍼부었다. 그가 대법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 따라 가뜩이나 대기업 로비가 불을 뿜는 미국 정치에서 기업의 영향력이 선거판으로 더욱 확대되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라는게 미국 정치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11월 미 중간선거에서의 금권선거 우려가 커질 것으로 이들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오바마는 취임 당시 금융권이나 건강보험업계 등 특정 이익그룹의 로비를 차단하겠다며 행정부 관료와 로비스트의 관계를 제한했다. 오바마의 민주당은 지금까지 기업보다 노조의 지지를 주로 받아왔다.

1947년 제정된 관련법은 선거 쟁점에 대한 찬반 의견을 제시하는 기업 광고만 허용할 뿐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선거 광고는 규제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기업의 선거 광고 제한 족쇄가 풀렸다. 판결은 대법관 5대 4 의견으로 결정됐다. 보수쪽 대법관들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해 기업의 목소리가 대중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아온 현행법은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반대로 진보쪽은 “계속 제한”을 주장했다.

어쨌든 지난 63년간 이어진 현행 법의 기업 광고 제한이 철회되면서 공화당이 친기업 광고 지원에 힘입어 11월 중간선거에서 약진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오바마는 “이번 판결이 외국 기업까지 미국 입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을 열어뒀다”고 지적하면서 금융개혁, 에너지법안, 건보개혁 등 자신이 추진해 온 주요 법안이 좌초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판결에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하고 초당적인 방안을 마련할 것을 행정부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한편 미 언론들은 미 정계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 조성돼 정치적 격동이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이번 판결로 미 정가의 로비스트와 이익집단, 현직에 있는 선출직 공무원의 입김이 강해지겠지만 정당과 선거 후보는 약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 로펌 스카덴 아프스의 로런스 노블은 “이번 판결로 로비스트들은 의원들에게 ‘우리는 당신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선거 광고에 100만 달러를 쓸 수 있다’며 위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반면 정당과 선거 출마자들의 목소리는 약화될 것으로 미 언론은 예상했다. 로비회사 패튼 보그스의 벤저민 긴스버그는 “정당의 힘이 줄어드는 대신 이익집단이 정당이 수행하던 기능을 빼앗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AP통신은 “선거 광고에 가장 발 빠르게 나설 것으로 보이는 미 상공회의소와 산별노조총연맹(AFL-CIO), 총기협회 등이 이번 판결의 승자”라고 평가했다. 한편 민주당은 기업의 선거 광고 규모 등을 제한하는 입법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워싱턴=최상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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