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여는 학인(學人) ③ 율곡 재해석한 최진홍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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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6세기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에게 ‘정치는 곧 소통’을 뜻했다고 강조하는 최진홍 박사 . 최 박사는 율곡에 대한 연구의 초점을 ‘사상가’에서 ‘정치인’으로 돌려놓았다. [김경빈 기자]

16세기 조선의 최고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1536~1584), 그가 오늘 우리 시대를 경영한다면 ‘세종시 문제’ 같은 정치 갈등에 어떤 해법을 제시할까. 정치인 율곡의 평생 화두는 ‘법과 소통’이었다. 율곡이 살았던 시대는 익히 알려진 대로 성리학의 전성기였다. 오늘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율곡도 대개 사상가의 모습이다. 요즘 말로 하면 성리학 전공 철학자인 셈이다. 지금까지 율곡 관련 논문도 그의 철학을 주제로 한 게 대부분이다.

최진홍 박사(47·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는 이 같은 연구 관행과는 다른 새 길을 제시한다. 정치가로서의 율곡을 먼저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 율곡이 먼저고, 철학자 율곡은 나중이라는 주장이다. 이제까지의 접근 방식을 뒤집었다. 율곡은 29세(1564년)에 관직에 진출해 49세에 작고할 때까지 조선 정치현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율곡에게서 정치와 철학(혹은 이념)은 어떤 관계일까. “율곡은 이기론(理氣論) 등의 이념으로부터 정치적 문제를 풀어내려 하지 않았어요. 대표작 『성학집요(聖學輯要)』도 철학서라기보다 정치학 교재에 가깝습니다. 율곡은 과거 시험을 주관할 때도 구체적 내용도 없이 글 장난만 일삼는 폐단을 비판합니다. 정치적 현안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문제에 집중했지요. 철학 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해 정치를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방편으로 이기론을 언급한 것이지요.”

정치가 먼저고, 이론은 나중이란 얘기다. 대개 주자학 이론을 중심으로 율곡의 삶과 정치를 해석해 온 연구 관행의 선후를 바꾼 것이다. 최 박사의 방법론은 개념화·이념화의 고정된 틀을 벗어나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새롭게 보게 한다. 최 박사는 이를 주제로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논문을 썼고, 최근 『법과 소통의 정치-율곡의 정치적 사고』(이학사)로 다시 풀어냈다. 율곡이 현실 정치에서 실제로 보고 듣고 느낀 정치적 경험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했다.

최 박사는 율곡의 정치적 사고의 특징을 ‘법과 소통’으로 요약했다. 물론 율곡이 말하는 법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의 법과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회를 규율 하는 원칙이란 점에서 적잖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율곡이 인식한 법은 엄벌성과 규율성을 가진 실정법만이 아니라 관습과 관례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율곡의 문제의식은 현실 정치의 폐해를 개혁하는 것이었어요. 선대가 남긴 ‘유폐(遺弊)’를 고치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습니다. ‘유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폐법(弊法)’이었어요. ‘잘못된 법’이란 얘기입니다. 폐법은 쉽게 개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율곡은 ‘폐정(弊政)’에서 찾았어요. ‘폐법’에서 ‘폐정’으로 문제의식이 발전한 것입니다. 폐정의 원인은 소통의 단절에 있다고 파악했어요. 율곡에게서 정치는 곧 소통이었습니다. 율곡이 주목한 폐정은 첫째는 잘못된 인사 문제였고, 둘째는 왜곡된 공론 문제였어요. 인사 문제와 공론 문제 모두 소통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았습니다.”

‘정치인 율곡’의 면모를 요즘 우리 현실 정치와 비교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율곡의 시대는 임꺽정의 시대이기도 했다. 율곡은 고향인 파주에서 임꺽정의 난을 경험했다. 그 난의 배경엔 고달픈 민생이 있었다. 민생 문제의 현안은 세금과 군역의 폐해였다. 율곡은 폐해의 원인을 궁극적으로 정치 문제로 보았다. 정치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적 해법이 대안이었다. 그것이 바로 소통이었다.

소통과 관련해 음미해보아야 할 대목은 율곡이 ‘논(論)’보다 ‘의(議)’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논’이 결론에 가까운 반면 ‘의’는 과정에 가깝다. ‘논’이 혼자서 내리는 결단이라면, ‘의’는 더불어 함께 구체적인 사안을 따져보는 것이다. 율곡은 ‘논’의 우월성만 주장되고 ‘의’의 우선성이 배제되는 정치 현실을 비판했다.

“조선 정치 시스템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의정부(議政府)’제도였는데 율곡은 의정부가 ‘논(論)정부’가 되는 현상을 비판합니다. ‘의’를 살려냄으로써 정치의 장에서 소통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국회의원(議員)이란 명칭만은 잘 지었다고 봐요.”

현대 정치학의 화두가 민주주의로 표현된다면 율곡 시대 정치는 ‘공론(公論)’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공론에 대한 율곡의 관점은 기존의 방식과 달랐다. 대개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관원들의 만장일치를 공론으로 간주하던 때였다. 그에 반해 율곡이 중시한 것은 ‘민정(民情)’이었다. 민정은 요즘 정치권에서도 많이 쓰는 ‘민의(民意)’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민정’은 ‘민의’와 다르다고 봅니다. 민의는 왜곡될 수 있지만, 민정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죠. 민정은 백성들이 현실 정치에 대하여 일차적으로 직접 느끼는 솔직한 감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율곡이 국왕 선조에게 폐법과 폐정의 개혁을 요청하면서 그 근거로 내세운 것은 ‘민정이 모두 원하는 바(民情皆願)’였어요. 율곡은 민정 그 자체를 공론으로 인식하고자 했습니다. 율곡식으로 보면, 세종시 해법을 찾는 정치인의 최우선 과제는 민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글=배영대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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