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풍속화의 쌍벽 단원과 혜원이 만나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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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조선조 풍속화의 쌍벽 단원 김홍도(1745~1806)와 혜원 신윤복(1758~1820?). 이들의 작품이 나란히 걸리는 보기드문 전시가 있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소장 전영우)가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작품을 꺼내 지난 15일부터 공개 중인 것. (29일까지) 다른 미술관에서는 할 수 없는 두 대가의 자체 소장품 전시다.

단원의 작품은 1788년 금강산 등 동해안을 사생여행하고 돌아온 뒤 그린 '금강산도' 와 불교에 심취해 남긴 '남해관음' 등 80여점. 혜원의 그림으로는 '소년전홍' '춘색만원' '상춘야흥' '주유청강' 등 양반사회의 생활상을 걸쭉하게 담은 30여점이 나왔다.

단원과 혜원은 풍속화의 양대 거봉이면서도 대비되는 예술세계를 보였다.

이는 서로 다른 삶의 궤적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게 이 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의분석이다.

단원은 국왕의 특별한 후원 아래 국가 최고의 화가 대접을 받는 등 온갖 특권을 누렸다. 국가기관인 도화서에서 일하며 영조와 정조의 어진(임금의 초상)을 그린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의 작품은 다수 남아 있다.

화원이면서도 문인화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면에는 스스로 사대부이고자 하는 무의식이 잠재해 있었다.

사대부 화가이자 스승인 표암 강세황을 만난것도 그의 화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단원은 정통회화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려냈다.

그는 진경산수화를 비롯해 산수, 화조, 인물, 사군자 등을 고루 섭렵하며 탁월한 필치를 과시했다.

반면 혜원은 당대의 대표적인 화원화가 신한평(1735~1809)을 부친으로 둔 것이 불운이었다. 가까운 친족은 같은 곳에서 벼슬할 수 없다는 이른바 상피(相避)관행 때문에 끝내 도화서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것이다.

몸은 비록 외방을 빙빙 돌았으나 작품은 서울 상류사회의 생활상을 세련되게 그려냈다. 그의 풍속화는 명문대가의 문화말기적 난만성을 흐드러지게 표현했다.

혜원은 남녀의 애정을 주제로 한 작품을 특히 많이 남겼다. 자유분방한 입장에서 붓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최실장은 "단원이 돌출한 재능으로 도화서에 입문하고 혜원이 누대에걸친 화원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취향은 오히려 반대일 수 있었다" 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대조적 화풍으로 진경시대를 마감한 이들 두 화가의 진면목을 비교. 감상하는 절호의 기회다. 02-762-0442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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