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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 웃다 80年] 1. '배삼룡'이 된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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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올해 내 나이 여든. 희극 배우로 산 지도 60년째다.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까지 추락도 해보았고,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정상도 맛보았다. 인생의 황혼녘에서 굳이 인생을 정리하려는 이유는 한 가지다. 나의 삶이 결코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유랑극단을 떠돌며 겪었던 숱한 좌절과 애환, TV의 등장으로 달라진 코미디언의 위상, 한국전쟁과 10.26 등 역사의 고비마다 요동쳤던 내 삶에는 코미디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인간 배삼룡의 웃음과 눈물을 이제서야 털어놓는다.

▶ 나는 스무 살에 악극단 "민협"에 입단했다. 그리고 "배창순"이란 본명 대신 "배삼룡"이란 예명으로 무대 인생을 살았다. 배.삼.룡, 그 이름 석자에는 남몰래 흘린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1945년 겨울이었다. 막 일본에서 돌아온 때였다. 일본 도쿄에서 트럭 운전사 노릇을 하던 나는 광복 소식을 듣자마자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 때 나이 스무 살. 청춘의 시작을 알리는 파릇한 나이였다. 그러나 직업은 없었다. 태어난 곳은 양구지만 자란 곳은 강원도 춘천이었다. 고향 춘천에서 실업자로 산다는 것은 정말 비참했다. 그 시절 나의 하루 일과는 시내를 거닐며 이 점포 저 점포 기웃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 극장은 아주 각별한 공간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나팔소리라도 들리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며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했다. 요란한 분장을 하고 거리를 누비는 배우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주머니를 자주 뒤졌다. 극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공연은 대부분 악극이었다. '며느리의 설움' '홍도야 울지 마라' '눈 내리는 밤' 등의 신파극은 내 가슴을 때렸다. 거대한 망치로 잠자던 내 혼을 사정없이 내리쳤던 것이다.

당시 춘천을 자주 찾던 악단은 'KPK' '아리랑극단' '호화선' '무궁화' '민협(民協)' 등이었다. 극장에만 들어가면 나는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았다. 어느덧 배우가 나의 꿈이 돼 버렸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거울 앞에서 온갖 표정을 짓고, 멋진 대사를 읊기도 했다.

그러다 정말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친구에게서 며칠 전 춘천을 찾은 극단 '민협'이 곤경에 처했다는 얘길 들었다. 돈이 없어 여관비를 내지 못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젊은 배우 한 명이 야반도주했다는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길로 나는 여관으로 달려갔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단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배우가 되고 싶다고?" 단원들은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뭘 잘 하냐? 한 번 해봐." 대뜸 반말이었다. "노래를 조금 할 줄 아는데요." 단원들은 노래를 시켰다. 순간 배짱으로 나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헛기침을 두 번 한 다음 노래를 내질렀다. 음정도, 박자도 없는 한 마디로 '자유당' 노래였다. 그래도 나는 넉살 좋게 2절까지 불러제꼈다.

다 듣더니 고참 배우가 손을 내저었다. "집에 가서 동생이나 봐." 나는 철렁 가슴이 내려 앉았다. 눈 앞이 깜깜했다.

그 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배창순입니다!"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그 이름은 너 한테 안 맞아. 차라리 삼룡이라고 해라. 배삼룡!". 웃음이 터졌다. 배우들은 대 놓고 킬킬거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삼룡'이란 이름은 조금 모자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배우가 되는 마당에 이름 따위가 문제가 될쏘냐. "그럼 삼룡이로 바꾸죠. 그까짓 이름이 대순가요. 그럼 입단을 허락해 주시는 거죠?" 그 때 단장으로 보이는 40대 남자가 나섰다. "널 배우 시키는 건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우린 밥값이 없어 여관에 잡혀 있다." 단장은 밥값을 대신 내주면 입단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라는 주문이었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배삼룡 <코미디언>

<필자 약력>

▶1926년 강원 양구 출생

▶37년 춘천초등 졸업

▶41년 일본 도쿄 니치보쓰(日沒)중 졸업

▶46년 악극단 '민협' 입단

▶50년 육군 군예대(KAS) 입대

▶64년 HLKV 문화방송에서 라디오방송 활동 시작

▶69년 MBC-TV 개국과 함께 코미디언 데뷔

▶80년 '삼룡사와' 도산, 신군부의 방송 출연 정지 처분으로 미국행

▶83년 3년 간의 미국 생활 접고 귀국

▶2001년 MBC 코미디언 부문 명예의 전당 오름

◆ 주요 출연작=MBC '웃으면 복이 와요', KBS '명랑소극장' '내 마음 별과 같이', 영화 '애처일기' '의처소동' '형사 배삼용' '배삼룡.이기동의 출세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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