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좀 솔직하게 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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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화와 칼' 의 저자인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악의와 불신으로 가득찬 사회의 전형으로 서태평양의 도부군도(群島)를 꼽았다.

이 부족에겐 행복과 웃음이 금기다. 적의와 불신이 미덕이다. 남편 재산이 얼마인지 묻는 아내가 있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아내마저 믿지 않는 불신의 극치다. 악의와 불신으로 자신의 이득을 채울 경우 이를 '와부와부' 라 해서 최고의 미덕으로 기린다.

*** 악의.불신이 넘치는 풍조

"대부분의 사회는 각자의 제도에 따라 악의와 불신을 최소화하려 하지만 도부에서의 생활은 적의와 악의를 극단적 형태로 키우고 있다. 그들에겐 모든 생활이 격투며 의혹과 잔혹성이 최대의 무기다" 라고 베네딕트는 탄식하고 있다.

이 인류학자의 탄식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들리는 듯하다. 악의와 불신의 검은 구름이 이 사회를 덮고 있다는 암담한 느낌이다.

남의 선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신으로 가득 차 매사를 믿지 않고 음모론적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게끔 돼 간다.

남북 정치지도자가 극적으로 화해협력의 평양선언을 했고 국민 다수가 감격했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 남북협상을 악의와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

노벨평화상을 타기 위해서, 북에 부모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과 협상책임자가 북에 모든 것을 양보한다는 악의에 찬 소문이 돈다. 아니 소문으로 그치지 않고 공공연히 떠들고 활자화까지 된다.

정부의 힘있는 요직은 특정지역 인사로 다 채워졌다는 게 이미 오래 전에 나온 시정의 평가다. 대통령이 나서서 해명하고 책임있는 정부인사가 그게 아니라고 통계 숫자를 들어 설득하지만 믿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인사편중과 낙하산인사는 이 정부의 고유 브랜드처럼 붙어 다닌다. 인사에 대한 정부 불신이 정책에 대한 의혹과 불신으로 연결된다.

의혹의 검은 구름은 의혹의 진원지를 캐고 말끔히 씻어내야 할 권력 주변에 더 짙게 몰려 있다. 옷로비 의혹 사건에 이어 실세장관의 외압대출의혹이 불거져 장관직까지 내놓았지만 의혹의 구름은 걷히질 않는다.

그 밥에 그 나물인 검찰이 수사를 해본들 결과는 뻔할 터이니 아예 특검제로 가는 게 옳다는 검찰수사 무용론까지 제기된다.

악의와 불신이 넘치는 이런 풍조는 어째서 생겨났나. 여러 이유,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솔직함의 결여' 때문이라고 본다.

정권 담당자들이 너무 솔직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신이다. 솔직한 권력? 웃기네 하겠지만 권력의 사악함과 은폐성을 막기 위한 장치가 인치(人治)아닌 법치, 투명성.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투명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고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의혹이 생겨나고 불신이 만연하며 적의가 발동하는 것이다.

대통령도 민심을 제대로 살피라고 당간부들에게 당부했다. 민심이란 어찌보면 정체불명의 두루뭉수리다. 한번 생겨난 의혹이 제때 풀리지 않으면 뭉게구름처럼 퍼진다.

진실 자체가 가려지고 선의가 악의로, 신뢰가 불신으로 둔갑하는 괴상한 속성을 지닌다. 이 의혹의 뭉게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권력이 좀 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권력의 모든 것을 까발리라는 게 아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라는 주문도 아니다. '어느 정도' 의 투명성과 공정성이나마 유지하라는 것이다.

*** 의혹은 제때 제대로 풀어야

의혹사건이 생겼으면 의혹의 실체를 제대로 밝히라는 것이다. 지금 이 사회를 덮고 있는 의혹의 구름은 대북정책.인사편중.외압의혹 세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국민적 논의와 합의를 거쳐야 할 대북지원과 협상을 국회를 거쳐 공개적으로 하지 않으니 의혹이 생겨난다.

쌀을 지원하되 국회 동의를 거치자는 것이다. 인사편중 낙하산인사는 TK, PK정권 때와 별로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전엔 인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를 극구 부인만 하니 불신이 생겨난다.

30년 야당투쟁에 우리도 봐줄 사람 많고 권력핵심에 제 사람 기용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냐는 그 솔직함이 지금 정권엔 없다.

솔직하게 시인하되 인사편중이 정책편중이 아님을 보여줘야 한다. 정권실세의 외압의혹은 그야말로 추상같이 다스려야 한다.

이 의혹을 덮으면 정권 전체에 금이 간다는 각오가 서야 한다. 검찰만 가면 의혹이 더 쌓인다는 불신을 차제에 검찰이 말끔히 걷어내야 한다.

대북정책의혹, 인사불신, 외압의혹이 이 사회를 악의와 의혹으로 가득찬 도부족(族)의 섬마을로 몰아갈 수 있다. 의혹과 불신을 걷어내고 좀 솔직하게 살아가는 풍토를 만들자.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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