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여직원, 고객사랑과 기지로 할머니 전 재산 지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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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10시 천안시 두정동 신한은행 창구. 한 할머니(83)가 은행원 이수진(28·사진)씨의 창구로 찾아와 3000만원짜리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송금을 요청하면서 폰뱅킹 신청도 했다. 이에 앞서 할머니는 전날 목돈 정기예금을 중도 해지하고 원금 3000만원을 수표 한장으로 찾아갔었다.

이씨는 큰 돈을 현금으로 바꾸고 다시 송금을 해달라는 할머니의 행동에 의문이 갔다.

할머니는 잠시 어디론가 통화를 했다. 이씨가 누구냐고 묻자 “손녀와 통화했다”고 했다. 손녀에게 돈을 송금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통화하면서 계속 존댓말을 쓴 것이 의심스러웠다.

다시 할머니에게 물었다. 손녀에게 송금하는 게 확실하신지. 할머니는 손녀라고 일관되게 말했다. 어쩔수 없이 ‘손녀’계좌로 3000만원을 송금했다.

할머니가 귀가한 후에도 찝찝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부지점장과 본사 경영감사부 검사역에게 보고했다. 이들도 수차례 할머니에게 전화로 확인을 했지만 "손녀가 맞다”는 답변만 들어야 했다.

불안한 마음에 할머니 집까지 찾아갔지만 집에 있질 않았다. 정황 상 의문을 갖게된 은행 측은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과 협의 후 혹시 모를 피해를 막기 위해 폰뱅킹 가입을 해지했다. 또 경찰은 협조공문을 통해 상대편 은행에 요청, 수취인 계좌로의 지급을 일단 정지시켰다.

경찰조사 결과 은행 직원을 사칭한 범인이 예금 금리를 더 높게 준다고 할머니를 유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은행 직원들에게는 절대 이야기하지 말고 믿지도 말라”며 할머니를 꼬드겼다. 은행원들에게 송금처를 손녀라고 말하라 시킨 것도 그들이었다. 다행히 송금됐던 돈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순간 잘못한 판단으로 할머니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3000만원이 날아갈 뻔한 것이다.

할머니 가족들은 다음 날 은행을 찾아와 이씨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씨는 “직원들 모두 평소에 보이스피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다”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희태 지점장은 “직원 이씨가 손님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이 할머니에게도 어머니·친할머니처럼 관심을 가졌기에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다양한 형태의 보이스피싱이 지역에서도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해 5월 어느 날 오후 9시 두정동 김모(44)씨 휴대폰에 한 남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당신 아들(중학교 2년)을 데리고 있으니 안 다치게 하려면 돈 500만원을 알려주는 계좌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마침 귀가한 조씨는 아들이 집에 있는지 부인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다행히 아들은 학원에서 돌아와 자신의 방에서 공부 중이었다. 만약 조씨가 먼 곳에 있어 아들 소재 확인이 늦었다면 돈 500만원을 송금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다양한 보이스피싱 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며 “대부분 기관을 사칭하는 방법을 많이 쓰는데 계좌로 돈을 송금하라는 기관은 거의 없다”고 당부했다.

글=김정규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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