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디지털시대의 관음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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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윤리적 일탈을 그리 꿈꾸지 않는 기자에게도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다. 어쩌다 호텔에 묵을 일이 있으면 방에 들어서자마자 방 단속부터 한다.

시계나 거울.장식용 그림 등 쉽게 다룰 수 있는 물건은 죄다 거꾸로 걸고, 스프링클러와 벽장 속까지 두루 뒤진다. 어딜 가나 카메라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만 되돌아봐도 참으로 무서운 세상임을 절감하게 된다. 아파트 지하주차장.헬스장 라커룸.전철역.패스트푸드식당 등 어떤 목적의 화면에든 서너번은 내 얼굴이 비쳤을 것이다.

설치 목적에 따라 감시카메라.관찰카메라.몰래카메라로 불리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거울과는 달리 카메라는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관음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 요즘 행동에 많은 위축을 느낀다. 도덕적으로 엄숙주의자가 되든지 아니면 스스로 윤리규범을 느슨하게 풀어 이 사회의 엿보기에 둔감해 지든지 선택해야 할 판이다.

'O양 비디오' 의 주인공과 '나도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를 쓴 탤런트 서갑숙씨를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진 것으로 미뤄볼 때 후자를 택할 것 같다.

관음증은 인류역사 어느 때나 있어왔다. 정신과 의사인 김정일씨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다보니 개개인의 원시적 본능을 억눌러 감출 수밖에 없었다" 며 "관음증의 배경에는 남의 사생활을 엿봄으로써 그렇게 억눌렀던 심리를 해방하려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고 설명한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인데다 저마다 개성을 강조하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사생활까지 기꺼이 드러내려는 욕구까지 겹쳐 사회 전반이 그런 분위기로 흐르고 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미 관음증에 대한 불감증은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대중과 가장 가까운 TV마저 예외가 아니다.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의 '처녀들의 저녁식사' 코너와 SBS '러브게임' 의 '결혼할까요' 코너 등이 대표적인 엿보기 프로들인데 한결같이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유명인 혹은 일반인을 '감옥' 에 가둬두고 우리 모두가 감시자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즐기다 보면 저도 모르게 남의 사생활보호를 잊게 되고 마음 속으로 '더 자극적인 장면을!' 이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국내 엿보기 프로의 경우 아직 위험수위는 아니지만 올 여름 엿보기 프로 '빅브라더' 신드롬이 일었던 미국과 유럽에서 그 폐해가 확인됐다.

특별히 마련한 공간 안에서 선남선녀들이 생활하게 해 놓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수십개의 비디오 카메라와 마이크로폰으로 일정시간 중계하는 이 프로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는 참가자의 섹스까지 끌어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편집한 화면을 내보낸 TV와는 달리 실시간 중계를 한 인터넷에는 접속 건수가 상상을 초월했다.

몰래카메라가 지닌 인간성 파괴의 위험은 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 에서 잘 그려졌다. 한 케이블 방송이 한 개인의 성장사를 몰래 카메라에 담아 시청률을 높인다는 줄거리인 이 영화는 아울러 미디어의 속성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엿보기 열기는 상업성으로 기울게 마련인 대중문화 제작자들을 선정성 쪽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하다.

TV에서 엿보기 프로가 오락 프로의 단골이 된 마당에 외국의 예에서 보듯 성적 장면을 잡는 카메라의 등장도 결코 멀지 않다. 이제 우리의 감각이 더 무디어지기 전에 관음증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진지하게 대안을 모색할 때다.

정명진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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