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봉제업체 ‘패션 명가’ 부활 날갯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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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영세한 봉제업체가 모여 있는 서울 창신동의 한 봉제공장(오른쪽). 서울시는 대부분 영세한 봉제업체들을 지원하기 위해 ‘동대문패션지원센터’(왼쪽)를 지난해 12월 열었다. [조용철 기자]


수십 층의 쇼핑몰과 옷가게가 줄지어 늘어선 서울 동대문은 새벽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한국 패션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바이어·디자이너·상인·쇼핑객 등이 잰걸음으로 최신 유행을 읽고 소비한다. 매일 저녁 패션쇼와 공연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동대문은 외국인 관광객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서울시가 패션산업을 ‘서울 신성장동력’이라 꼽으며 이뤄진 지원도 동대문 상권이 중심이 됐다.

하지만 패션산업의 단단한 밑그림이 되어주었던 봉제공장들은 힘겨워졌다. 1960∼70년대 뜨거운 연기를 뿜어내며 한국을 먹여 살린 공장들이다. 청계천가 봉제공장에서 노동 환경을 개선하라며 몸을 불사른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 여공들의 머리는 하얗게 세고 이마에 주름이 패었지만 환경은 변한 게 없었다.

지난 15일 서울 동대문의 창신동 고개 주택가 지하에 자리 잡은 한 봉제공장. 지하로 난 계단을 내려가 좁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소리가 들렸다. 환기구도 없는 초등학교 교실만 한 공장 안에서는 재봉사 두 명이 어두운 조명 아래 남성복을 만들고 있었다. 동수어패럴 한상철 사장은 “낡은 작업환경을 바꾸고 싶지만 신규 투자할 형편이 못 된다”고 말했다. 20여m 떨어진 곳의 봉제공장에서 20년째 재봉사로 일한다는 김양미씨는 “해외서 온 바이어들은 아줌마들이 지하에서 작업하는 걸 보면 그냥 떠난다”고 전했다.

동대문의 봉제공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는 일감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서울에만 4만여 개에 달했던 봉제공장이 1만5000여 개로 줄었다. 동대문의류봉제협회 라병태 회장은 “동대문 창신동과 숭의동 일대 봉제업체 대부분은 지하 단칸방에 세 들어 있는 영세업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의 임금이 오르기 시작한 2년 전쯤부터 이곳에도 차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소량 단납은 한국이 제일’이라는 평판과 함께 ‘국내산 옷의 품질이 좋다’고 믿는 국내 소비자들이 늘어난 덕분이다. 동대문 봉제공장에서 만들어 해외 시장에 선보인 옷을 보고 공장을 방문하는 외국 바이어도 늘고 있다. JM컬렉션 김종문 대표는 “해외 바이어 발길이 부쩍 늘었지만 성과는 크지 않다”며 “대부분이 영세업체이다 보니 해외 시장에 진출할 만한 마케팅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봉제업체들은 하지만 서울시가 지난해 12월 15일 숭인동에 ‘동대문패션지원센터’를 열면서 패션 명가로서의 부활을 꿈꿀 수 있게 됐다. 28억원을 들여 조성한 지원센터는 1576㎡(440여 평) 규모에 디자이너가 있는 디자이너실, 한 대에 500만원이 넘는 첨단 재봉틀 등이 있는 특수기계실, 바이어를 위한 해외 마케팅실, 제품 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 현재 7명의 젊은 디자이너가 입주해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려는 봉제업체를 돕고 있다.

최신식 공장에는 9개 봉제업체가 입주해 있다. 입주한 봉제업체 ‘재재’의 유선종 대표는 “40여 평(165m²)의 지하공장에 세 들어 있을 때, 임대료를 300만원 가까이 내다보니 재봉틀 하나 바꾸기도 어려웠다”며 “이곳은 임대료가 절반에 불과하고, 특수 재봉틀 등을 지원해 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유 대표는 현재 외국 바이어를 소개받아 해외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다.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명맥을 유지해 왔는데 다시 패션 명가로 부활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임주리 기자 ,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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