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한가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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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추고마비(秋高馬肥)라고도 하는 '천고마비(天高馬肥)' 는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으로, 풍요로운 가을을 가리킨다.

그러나 원래는 외적의 침입을 걱정해 생긴 말이었다. 중국 전한시대에 조충국(趙充國)이란 이가 북방의 흉노와 강(羌)족이 연합해 쳐들어올 것을 내다보고 "가을에 말들이 살찌면 반드시 변고가 일어날 것이다. 대비해야 한다" 고 말했다는 기록이 한서(漢書)에 나온다.

여기에 대시인 두보(杜甫)의 할아버지뻘(종조부)인 두심언(杜審言)이 당나라 초기에 한마디 더 거들었다.

흉노를 정벌하러 떠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을하늘은 높고 변방의 말들은 살이 쪘겠지. 자네는 말 안장에 올라 장검을 휘두르거나 붓을 잡고 격문(檄文)을 써날리겠지' 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반도 가을하늘의 높고 푸름을 어찌 중국 변방에 견주랴. 가만히 쳐다만 보아도 정밀(靜謐)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중국시인 누군가가 남긴 '국화꽃잎 소리없이 떨어지니 사람의 마음도 맑고 고요해지네(落花無言人淡如菊)' 라는 시구는 우리의 가을에 더 어울린다고 우기고 싶다.

해방 후 북한에 남아 생사를 알 수 없는 시인 백석(白石)은 산문시 '고야(古夜)' 에서 가을의 또 다른 정경을 노래했다.

'내일같이 명절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팟소 설탕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물으며 힌가루손이 되여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라고.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안방큰방은 홰즛하니 당등을 하고/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여있어서들/오가리며 석박디를 썰고/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눌을 다지고/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양염내음새가 싱싱도 하다/밖에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고 그의 다른 작품 '추야일경(秋夜一景)' 은 읊었다.

오늘 추석연휴가 시작된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지만 가을비는 '장인의 나룻 밑에서도 긋는다' 는 속담대로 잠시 내리다 그치게 마련이다.

오랜만에 가족.친지들을 만나 삶의 고단함을 잠시 접는 한가윗날엔 하늘도 높게 개면 좋겠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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