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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지키려고 의회 떠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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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저는 눈 덮인 의사당을 떠나 알링턴 국립묘지에 갔습니다. 오랜 동료였던 테드 케네디의 비석을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할 바로 그때가 왔다는 것을. 30년 동안 저에게 특권을 주신 코네티컷주 주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6일 크리스토퍼 도드 상원의원)

“아직 공직에 대한 강한 열정이 있습니다. 다시 출마해서 이길 자신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도 두어 권 쓰고 싶고 강의도 하고 싶습니다. 고민 끝에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에도 노스다코타주와 미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5일 바이런 도건 상원의원)

“제 아내가 난소암에 걸렸습니다. 이제 저는 아내 곁에 서서, 그를 지켜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의회를 떠나려 합니다. 캘리포니아주 선거구민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지난해 12월 29일 조지 라다노비치 하원의원)

멋스럽기도 하고, 솔직하기도 하고,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한 미국 의원들의 차기 선거 불출마 변이다.

워싱턴DC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은 백악관이 아니라 의사당이다. 의사당 회의장은 우리나라 법정처럼 생겼다. 의원들의 자리는 재판부가 앉는 법대처럼 높게 배치돼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건, 별 넷 계급장을 단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가니스탄 주둔군 사령관이건 의원들을 우러러 보며(?) 증언해야만 한다. 일부에선 차기 선거 전망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권위와 영예가 보장된 자리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 더 인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들의 불출마 자체가 아니라 불출마 발표 시점이다. 지난 연말연시에 불출마를 선언한 의원은 상원·하원을 합해 30명이 넘는다. 빌 리터(콜로라도) 등 이 대열에 합류한 일부 주지사까지 합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이들이 도전을 포기한 차기 선거는 4년 임기의 대통령 집권 2년 차에 열려 ‘중간 선거’라고 불리는 11월 선거를 말한다. 그러니까 선거가 1년 가까이 남은 상태에서 불출마 결심을 공개하는 것이다. 상원의원의 경우 임기가 6년이라 그럴 만하다 해도 임기 2년의 하원 의원은 임기 절반쯤에 불출마 선언을 하게 되는 셈이다.

“왜 그리 일찍 불출마 선언을 하느냐”는 질문에 미 의회 관계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연한 관행’을 왜 특별하게 바라보느냐는 투였다. “뜻을 품은 정치 신인들은 변화된 환경에서 당내 경선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지역 주민들은 새로 일을 맡길 사람이 누구인지 꼼꼼히 살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배려는 이제 관행을 넘어 의무가 되고 있다.”

일찍 불출마 선언을 하면 ‘힘’이 빠져 의정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의원들이나 공천 탈락 때까지는 진퇴를 고민조차 하지 않는 의원들에게 익숙해진 우리의 눈에 이 같은 모습이 신선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당장 지방선거가 6월에 있지 않은가.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