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통일부는 하나로 족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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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평양 방문 이후 남북교류가 급류를 타고 있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 특유의 호방한 언행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8.15를 전후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온 국민의 눈물선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국정원장이 왜 密使 맡나

특히 수십년 동안 북한에 대해 소개 조차 인색했던 신문과 방송이 일제히 찬양.고무에 앞장섰으니 국가보안법은 이미 사문화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국민이 눈앞에 다가온 듯 통일을 느끼며 부푼 기대를 갖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흐름만 있지는 않았다. 특히 북송을 앞둔 일부 비전향 장기수들의 분별없는 처신을 보며 낭패감을 느낀 것이 비단 필자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애국지사를 보내듯 지방별로 이어진 환송행사도 마뜩찮았지만 한 교회의 환송예배 도중 납북자 가족들이 북송될 장기수에게 북한에 가면 납북자 생사 확인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하자 "납북자란 없다" 고 소리치며 발끈해 행사장을 떠나는 모습에서는 분노마저 치밀어 올랐다.

또 송환을 거부한 빨치산 출신 비전향 장기수는 인터뷰에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나혼자 편안하게 갈 수 없었다. 남한에서의 통일사업을 위해 잔류키로 했다" 고 주저없이 말하고 있으니 전향하지 않은 채 남한에 남아 통일사업을 어떻게 하겠다는 뜻인지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도대체 이들이 누구인가. 북송키로 한 63명은 전원이 빨치산(13명) 아니면 간첩(46명).인민군(4명)이다.

우리나라를 뒤엎기 위해 인명 살상.국가기밀 탐지.유명 인사 포섭 등을 일삼았던 사람들이다. 한 예를 들어 김인서(75)씨는 빨치산으로 활동하며 경찰관 69명을 살해하고 3개 지서.파출소를 습격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34년을 복역한 사람이다.

아직도 우리 주변엔 이들 범죄의 피해자가 상당수 남아 있다. 인도적 차원을 강조하며 남북화해 교류협력에 일조하고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명분 때문에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하지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기로서니 그들이 이 땅에서 그토록 당당하게 큰소리 쳐도 되는 것인가.

더욱 분통터지는 것은 이들이 이토록 기고만장할 때 들려온 국군포로 4명의 귀환소식이다. 진정한 우리의 영웅 대접을 받아야 할 국군포로가 어째서 죄인처럼 몰래 들어와 한달을 조사라는 명목으로 갇혀 지내고 그 가족들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가.

빨치산.간첩.인민군은 북한의 항공기가 와서 성대하게 모셔가는 마당에 목숨을 걸고 50년 만에 북한을 탈출한 70대의 국군포로는 제3국을 통해 쉬쉬하며 밀입국하듯 해야 하는가.

이러고도 국방부는 젊은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지키라고 국방의 의무를 강조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 대북관계 차분히 정돈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부 당국의 책임이다.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누구보다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북한을 지켜보고 경계해야 할 국가정보원장이 대북밀사 창구를 맡은 것부터가 잘못이다.

특히 평양 방문 도중 공개적으로 김정일 위원장과 술잔을 부딪치고 귀엣말을 나눈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대북관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내면 반통일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사회 풍조도 정부의 이와 같은 자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활한 대화나 교류를 위해 남측이 양보하고 져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할 수도 있고 그런 역할은 통일부 혼자 맡아도 충분할 텐데 최근 움직임을 보면 행정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통일부 역할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남북관계의 정리정돈을 해야 한다. 통일정책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식으로 돼서는 결코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북한 눈치보기에 급급해 정당한 목소리마저 움츠러들게 된다면 우리는 정체성 상실과 함께 국론 분열이란 부담마저 겪게 될지도 모른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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