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제삿날된 잔칫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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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러시아가 바렌츠해에 침몰한 핵잠수함 쿠르스크호의 사망 승무원 1백18명을 추모하기 위해 국가 애도일로 선포한 23일은 공교로운 날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3년 치열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측이 완승을 거둔 전승기념일이기 때문이다.사고 잠수함은 바로 이 러시아 남동부 도시 이름을 딴 것이었다.

7월 5일 시작한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1백10만여명의 병력과 3천3백여대의 전차를 동원해 2천7백여대의 전차와 90만 대군으로 공격을 가해온 독일군을 물리쳤다.

세계 전사(戰史)에 '쿠르스크 전투' 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이 싸움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에 가한 최후의 대규모 공격이었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17개 정예 기갑.자동화 사단을 포함한 50개 사단을 잃고 공격력을 상실한 채 러시아 땅을 떠났다.

그해 2월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열악한 조건에서 러시아 군인.국민이 갖은 희생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킨 것이라면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이 무기.전술 등 총체적인 역량에서 독일을 압도한 첫 전투다.

이 전투는 지금까지도 세계 최대 규모의 전차전으로 기록돼 있다.게다가 독일군과 소련군을 합쳐 4천여대의 항공기까지 동원했다.

당시 국가 기술력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전차와 항공기가 주력으로 등장한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소련은 자존심을 살리고 국력에서 자신감을 얻었다.독.소전 개전 초 연패로 모스크바 코 앞까지 후퇴한 창피를 일거에 씻어버린 것이다.이 전투의 승리로 소련은 강국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했으며 이 지위는 이후 50여년간 유지됐다.

따라서 전투를 승리로 마감한 8월 23일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그렇게 외쳐온 국가 자존심과 강한 러시아를 상징하는 날인 것이다.

그런 영광스런 날에 푸틴은 쿠르스크호의 모항인 비댜예보에서 쿠르스크호 승무원 유가족을 만나 보상금 지급을 언급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강한 국가, 존경받는 국가는 결코 구호나 정치선전으로만 이뤄지지 않음을 새삼 확인한 장면이었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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