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휴지조각' 정치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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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민의 정부는 오늘로 임기 중 절반이 지나 집권 후반기를 맞이했다.

몇몇 여론조사를 보면 김대중(金大中)정부가 "그동안 잘했다" 는 평가가 높게는 70%대에 이른다.그러나 다른 분야에 비해 유독 정치분야만은 공통적으로 점수가 낮다.여권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여하튼 현 정권도 정치불신 해소엔 실패한 듯하다.말(言)들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1997년 11월의 DJP 합의문이 실언(失言)의 시초다.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성사시키고 새 정부의 총리는 자민련에서, 국무위원은 국민회의(당시)와 자민련이 50대 50으로 맡는다는 것이 합의문의 요지였다.새 정부가 들어선 뒤 내각제 개헌은 유보됐다.올해 초 국민회의가 민주당으로 탈바꿈하고 당 강령에서 '내각제' 가 빠짐으로써 아무도 내각제 약속을 믿지 않게 됐다.

여야 사이도 그렇다.여야 총재가 몇차례 만나 합의문을 발표했지만 거의 휴지조각으로 변했다.예를 들어 '여야가 국회에서 정책을 중심으로 경쟁하고 건전한 의회정치를 발전시켜 나간다' (올 4월 총재회담 합의문)는 약속이 지켜졌다고 보는 이는 거의 없다.지난 4.13 총선 후에는 여야가 공통공약을 함께 입법화하겠다고 다짐하더니 감감무소식이다.

93년 7월 이후 연립정권으로 지탱해온 일본 집권당도 합의문을 양산했다.그러나 이들의 합의는 정책이 기준이라는 특징이 있다.

93년에 8개 정당.당파가 자민당을 따돌리고 발족시킨 연립정권의 합의문은 내치.외교에 걸친 12개 정책을 꼼꼼히 못박았다.합의가 깨지면 재협상하거나 연립에서 나와야 한다.

국민의 눈총을 의식하기 때문이다.지난해 10월 자민.공명당과 함께 3당연립을 출범시킨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자유당 당수는 안보.사회보장 정책합의문 실행이 지지부진하자 올봄 연립정권에서 뛰쳐나왔다.오자와라 해서 정략을 부리지 못할 리 없다.어디까지나 정책을 명분으로 다투는 것이다.

그제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나선 두 후보가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와의 결별' 이나 '독자적 정권 창출' 을 주장하자 자민련이 "적과 동지도 구별 못한다" 며 발끈하고 나섰다.민주당과 자민련의 정책상 공통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판에 정말 보기딱한 설전(舌戰)만 벌이고 있다.사람(人)이 말(言)을 지켜야 믿음(信)이 생기는 법이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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