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김정일의 메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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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한반도를 일정 영역에서 사실상 관리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 아니냐는 게 나의 생각이다.

금년봄 이후 남북간에 이뤄진 여러 형태의 회담, 상봉 및 방문, 그리고 경협은 그의 결단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北체제 충성자 철저히 챙겨

물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포용정책이 金위원장의 결단을 가능케 하고 그를 더 빛나게 만든 측면은 부인할 수 없다.그럼에도 지금 남북간에 벌어지는 각종 이벤트성 행사는 그가 빚어낸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뿐인가.

우리 정부의 일상업무에도 그의 입김은 작용하고 있다.연례적인 한.미 을지연습도 형해(形骸)만 간직한 채 숨죽인 듯 진행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내외에 보이고자 한 가장 주목할 메시지는 다음의 두가지라고 분석할 수 있다.첫째, 남북문제의 행로는 전적으로 자신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다.둘째 메시지는 북한체제의 유지 및 옹위에 관련된 인사와 희생자에 대한 철저한 챙기기와 배려의 의지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는 방북 언론사 사장단과의 오찬에서 "통일시기는 내가 맘 먹을 탓" 이라고 거침없이 말해 첫 메시지를 분명히 각인시켰다.

정상회담의 개최와 그 합의도, 남북 직항로의 통항도, 남쪽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도,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도, 개성공단 및 관광개방도 모두 그의 결단에 따라 이뤄졌거나 실현될 사항들이다.

그는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두어차례 더 해보고 내년엔 가족들의 집까지 갈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으며, 남북 장관급회담의 속도를 3차부터 본격적으로 높여나가겠다고 회담 진전상황을 예고했다.

좋은 소식이지만 너무 일방적이다.남북간 각종 회담에서 북측의 승인이 없는 한 단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정황이다.

둘째 메시지는 며칠 후면 북한으로 송환되는 미전향 장기수 출신 인사 63명의 운명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북측의 끈질긴 문제제기의 결실이다.

이번 이산가족 서울방문단의 주력인사들을 의용군과 입북자 출신 중 성공한 인사로 채운 것이나, 월북했던 전 외무장관의 미망인을 단장으로 보란 듯이 내려 보낸 이면에도 그의 입김이 작용했음직하다.

인공기를 학교에 내건 남쪽 학생들까지 챙기는 판이다. 식량난이라는 고난의 시절을 맞았던 북한을 통 크게 도운 정주영(鄭周永)전 명예회장의 현대그룹에 개성공단 및 관광사업 개발권으로 보답하면서 그는 "현대에 특혜를 주었다" 고 숨김없이 말했다.

자기 체제를 떠받쳤고 충성했거나 도움을 준 인사들에 대한 확실한 보상의 메시지다.이에 반해 우리 정부는 안보를 담보하는 을지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아 미국이 급기야 "북한군 역시 올 여름에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고 우회적인 불만을 털어놓게 했다.

우리 체제를 타격하려던 인사들을 북측으로 보내는 데 합의해 주면서도 국군포로와 납북자문제를 제기했는지조차 불투명했다.

정부의 이런 분위기는 바로 사회 일부에 투영돼 건설적인 대북비판이나 과거사의 앙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반통일적.냉전적 행태로 지탄받는 형국으로 발전하고 있다.

납북자가족모임의 대표인 최우영씨는 심지어 여러 인권단체.시민단체들이 미전향 장기수 출신 인사들의 송환과 연계해 "납북자를 데려오라는 소리는 하지마라" 고 납북자 가족들에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한 납북자 가족이 이같은 무관심과 냉대를 두고 "어떻게 이 정부를 '국민의 정부' 라고 생각하겠느냐" 고 분노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DJ 입장도 배려해야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김대중 정부는 여러 형태의 남남갈등과 불안한 경제상황에 처해 있다.여기에 대북문제까지 비판의 과녁이 되는 사태에 직면한다면 북한에도 좋은 일은 아니다.金위원장은 수차 金대통령에게 빚을 졌다면서 "金대통령과 내가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고 동반자로서의 신뢰감을 표시했다.

金대통령이야말로 지금 남쪽에서 북한을 가장 성실하게 도왔고 또 협력할 분이 아닌가.

金대통령이 국군포로.납북자.이산가족 문제로 고생한다면 그를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한반도에서 金위원장뿐이다.金위원장이 광폭정치.인덕정치의 본령을 발휘해야 할 최적의 시기다.

이수근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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