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유창혁 슬럼프 바닥은 어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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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9단이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상태가 악화돼 어린 후배들에게만 4연패를 당하고 있다.

패배의 일지를 보자. 7월 27일 SK엔크린배 명인전에서 최명훈7단에게 불계패, 8월 4일 LG정유배 프로기전 8강전에서 최명훈에게 탈락, 8월14일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이세돌3단에게 탈락, 8월 16일 KBS바둑왕전에선 소녀기사 박지은2단에게 탈락.

유일하게 4연승을 달리며 도전권을 바라보던 명인전에서의 패배는 쓰라렸다. 유9단은 이제 조훈현9단과 목진석5단을 모두 꺾어야 자력으로 도전자가 될 수 있다.

많은 기전에서 본선탈락이 이어져 이제 명인전 외에 유9단의 이름이 올라 있는 본선이라곤 기성전 하나 뿐이다. 대국이 너무 없어 심심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세계 정상급의 실력자요, 월간 '바둑' 에서 매긴 올해 초의 세계 랭킹에서도 이창호9단 다음의 2위에 올라 있던 유9단이 이렇게 급속도의 부진에 빠진 것은 아마도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전에서의 패배 탓일 것이다.

유9단은 올 1월엔 2전2패했지만 2월 들어 9연승을 달리는 호조를 보였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2월부터 시작된 중국의 위빈(兪斌)9단과의 LG배 결승전. 유9단은 여기서 1승3패로 졌다.

준결승전에서 이창호를 꺾은 유9단이 만만해 보이는 위빈에게 진 것은 큰 화제였다. 본인도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심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유9단은 이후 국제기전에서 연전연패했다. 3월의 농심신라면배에선 중국의 창하오(常昊)9단에게, 5월의 잉창치(應昌期)배에선 일본의 노장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9단에게, 6월의 후지쓰배에선 창하오에게, 그리고 새로 시작된 LG배에선 중국의 저우허양(周鶴洋)8단에게 각각 패배했다.

이리하여 유9단의 2000년 국제기전 전적은 1승6패. '큰 승부에 강한 유창혁' 이란 평가가 무색하게 됐다.

이런 국제전의 참패가 최근에 와선 그런대로 페이스를 유지하던 국내기전마저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강력한 실력자 유창혁은 이런 식으로 계속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유9단은 슬럼프에 대해 빙긋이 웃을 뿐 말이 없다. 하기사 기분에 영향을 크게 받는 그는 예전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극심한 편차를 보이곤 했다.

바둑계에선 유9단이 삼성화재배 아니면 배달왕기전에서 다시 일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화재배는 올해 남은 유일한 세계기전이고 배달왕기전은 유9단이 타이틀을 갖고 있는 유일한 기전이다.

배달왕기전에선 이창호9단.이세돌3단.이희성3단.박영훈초단 4명이 준결승에 올라 도전권을 다투고 있는데 만약 이 타이틀마저 잃는다면 유9단은 내년도 세계대회 출전에 상당한 곤란을 받게 된다. 유9단은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왔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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